먼저 쓴《예쁜 여자 만들기》와《몸에 갇힌 사람들》,《다이어트의 성정치》에 이은 ‘여성의 몸’을 한편 더 엮는다. 찾아보니 몇 해 전에 쓴 포르노 관련 서평이 있다. 그때의 서평을 ‘간단조립’ 해서 묶는다. 여성의 몸 탐사까지는 아니고 질문 몇 개 던져두는 차원이다. 몸 탐닉은 시도조차 못하고 있다.

변명을 대자면 고혈압 주의보가 내려진 한여름이고 게다가 나는 갱년기 증상을 종합세트로 겪고 있는 중이다. 이러다보니 집중력과 인내를 요구하는 일에 몸을 사리게 된다. 이 말은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전력투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하여간 형질변경되는 내 몸을 들여다보면 서글픈 감상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다. 한때는 울울창창 청춘의 열기로 가득 찼던 몸. 열기가 식어가는 대신에 몸을 사유하는 시간을 얻은 것을 위로라고 친다면 덜 서글프다.(뭐라도 붙잡아야 살지 않겠나) 

성 상품으로 취급받는 여성의 성(性)은 아프다. 페미니스트 운동가로 저명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은 여성 성 노동에 관한 이야기다. 성이 과연 노동차원으로 불려도 되는 것인지, 다른 명명은 가능한지 논의는 별개문제로 일단 미뤄둔다.

내 블로그는 유입경로가 표시되는데(I.P 주소까지 나옴) 지난 며칠간 여성의 성과 관련된 검색어가 부쩍 늘었다. 앞서 쓴 <예쁜 여자, 누가 만드나> 때문으로 본다. 풍만한 여자, 가슴 큰 여자, 다리 예쁜 여자, 속궁합 맞는 여자, 우리나라 예쁜 여자 스타는 그래도 양호하다. 연예인 노출, 백인여자 노출, 서양여자 보지 노출 등 아주 ‘지대로 꼴린’ 단어들도 여럿 있다. 노골적인 이런 유입 검색어 덕분에 이 글을 쓸 계기를 만들었다. (이 글을 쓰고나면 더 화끈한 검색어까지 유입될 것으로 예상한다) 예쁜 여자와 성적 대상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또 실제로 예쁜 여자는 똑똑한 여자 보다 성적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던가.

‘쌓여있는 박스와 여행가방 속에서 살았던’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페미니즘의 여러 주제 가운데 성(性)과 노동을 집중적으로 캔 인물이다. 스스로 바니 걸로 위장취업해서 현장을 스케치하기도 했던 인물로 유명하다.(옆사진)《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은 다소 강한 웅변조로 진행되지만 여성의 성적 착취와 남용, 오용의 폐단을 지적한 점은 현실감 높다.

우선 간략하게 페미니즘의 정의를 개괄하자면,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은 1인칭화 된 여성관이고 ‘소수자와 약자가 존중 받는 세상’을 향한 운동은 인종과 빈부의 경계를 넘는 확장이다. 굳이 여성을 약자로 배치할 필요가 있느냐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여성은 최소한 남성 중심적인 시선과 제도로부터 약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사우디아라비아나 아프가니스탄처럼 폐쇄된 종교국가에서 여성은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가족의 폭력 대상이기도 하다.

비교적 여성의 사회적 신분을 보장받는 미국도 여성은 성 착취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강압적인 성매매는 물론이고 성매매에 빠진 여성을 향한 사회의 시선은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이 성에 관해선 ‘불결하고’ ‘천한’ 것으로 미루고 있다. 불가촉천민 취급을 하면서도 성매매 국가의 오명을 씻기 위해 여성차별을 개선할 의지는 부족해 보인다. 이런 시점에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성착취 시선은 사회담론으로 부족하지 않다. 인체는 외부와 소통하는 ‘창(窓)’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한다면,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포르노를 통해서 남성은 무엇을 보고 여성은 무엇을 발견하는가를 묻고 있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을 읽다보면 남성/ 여성의 이분법 대립을 목격하게 된다. 굳이 경계선을 의도적으로 그릴 필요가 있을까 싶을 무렵에 ‘남성 이해하기’를 중간에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남성을 공격하는 논지이므로 ‘적과의 동침’이라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 이렇게까지 저자가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남자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수긍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여성 운동이 공격적이라는 말은 불평등한 상황을 지적하는 여성의 메시지를 두고 남성의 권력이 만들어낸 말이다. 축첩제도와 정치와 종교를 이용해 여성의 성과 인권을 공격했던 자세야말로 오랜 시간 남성이 자행해온 일이다. 자본주의가 만개하고 나서부터는 ‘자본은 새로운 페니스’로 여성을 압박하고 강제하고 착취했다. 마침내 여성은 자본 앞에서 스스로 토끼인형으로 둔갑을 한다.(플레이보이紙 창시자 휴 헤프너와 그의 여자 친구들을 보라! 자본가인 남성은 인간의 옷을 입었지만 옆의 여성들은 토끼 의상을 입고 토끼 흉내를 내고 있다)

이슬람 국가에서 가부장제의 성과 생식 기능을 통제하기 위하여 여성의 음핵을 절단하거나 봉합했다면 여성해방 운동의 중심지라는 뉴욕에선 포르노 상영이 성황중이다.(어디 뉴욕뿐이랴) 이것을 두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전통과 관습을 초월한 ‘인권의 문제’로 지적한다. 일례로 여성을 가정에 안주시키고 앞치마를 두르게 만들고 남성은 바깥 경제활동을 통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만든 제도는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이다. 얼핏 보면 처자식을 책임지는 믿음직한 가장의 역할이지만 그 대신 여성은 많은 것을 포기할 상황이다. 직업은 물론이고 사교와 자아실현과 사회참여에 제한을 받는다.

“기성체제는 자신에게 도전하는 모든 사람들을 처벌하여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특히 여성들의 저항은 가장 근본적인 사회 구조에 타격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처벌은 처절하다. 성역할 구분은 기존 질서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구의 절반에게 직장이나 전쟁에서 먼저 나서야 한다고 믿게 하고 다른 절반에게는 무임금이나 저임금 노동으로 봉사해야 한다고 믿게 만든다.”-(220쪽)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이렇게 여성에게 일할 권리를 제한하는 것을 두고 남성의 권력이 여성으로부터 도전받는 것을 예방한다고 직언한다. 어렵게 현관문을 열고 사회로 진출해 직업을 갖는 여성은 더 많은 담벼락을 대면한다. 남성의 권위와 남성이 만든 제도에 도전한다고 여긴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선 차별은 불가피해진 것이다. 여성의 노동권은 성적인 문제와 뗄 수 없는 동반자다. 여성들은 노동시장에서 저임금, 감원, 승진불리, 성희롱을 경험한다.

반면에 이 지점에서 남성의 반론 제기도 가능하다. 여자이기 때문에 더 유리한 상황도 존재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물론, 성을 제공하거나 여성우월주의자인 상사를 만날 경우에는 상황은 달라진다. 이런 경우 승진과 지위 유지에서 유리한 선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조차 여성의 성이 이용되었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자발적이든 타의적이든 여성의 사회적 성공과 승진에 여성의 성이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면 그것조차 여성은 성적 대상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타의적 개입이 강하게 작용했다면 성착취이면서 불평등한 인권차별이다. 

더 나아가 휴 헤프너가 창립한 뉴욕 플레이 보이클럽 바니 걸은 여성 스스로가 남성의 지배하에 놓이는 합법적 장치로 거기엔 당연히 자본, 즉 돈이 삐끼 역할을 한다. 남성에게 의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재능 있는 여성 자신 뿐 아니라 사회에 큰 손실이다. 왜냐하면 남성의 제도와 남성의 권력과 남성의 사상에 여성의 사상과 정서와 출산이 저당 잡히기 때문이다. 다양성과 공존이 말끔하게 희석되고 제거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범답안은 따분한 것이어서 한 큐로 성공하려는 여성들을 손아귀에 넣고 돈놀이를 하는 포르노 사업은 망하지 않는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의 내용 80%를 차지하는 성 담론은 여성의 인권을 거론할 때마다 새삼스럽지 않은 ‘익숙한 풍경’이지만 그 중 Deep throat’(목구멍 깊숙이)는 성(性)과 인권을 대표할 수 있는 얘기다. 포르노 영화가 X등급 영화로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게 만든 오럴섹스의 진실은 “그건 성적인 게 아니었어요......맞지 않기 위해 즐거워하는 척 했을 뿐에요”-(143쪽)결론이 난다. 즉, 영화 <Deep throat>의 주인공인 린다 러블레이스는 남편이자 매니저인 척 트레이너의 폭행과 협박에 의해 강요된 포르노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섹스가 상업주의와 결탁해서 유통의 물결을 탄 역사는 로마 유적지에서까지 찾을 수 있다. 여성의 성을 정복했다는 의미인 ‘암캐, 따먹다, 몸을 버리다(망치다)’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도 ‘갈보, 걸레, 조개’라는 호칭으로 여성의 성을 비하한다. 젖소부인, 애마부인, 염소부인은 있지만 젖소남편이나 애마남편은 없다. 반면에 남성을 비하하는 단어는 많지 않으며 더구나 악의를 품은 은어는 찾기 어렵다. 내가 아는 것은 ‘남창’이 유일하다.

이렇게 여성의 성이 ‘한 개의 수단’-남성의 성 만족과 돈을 벌어주는-이 되는 과정에서 여성은 인격이 거세된 존재로 전락한다. 불특정 남성과의 오럴섹스에 이어 린다는 개와의 섹스까지 강요받는다(애니멀 섹스). 개와의 섹스는 여성으로부터 인간성을 강탈하고 ‘한 개의 살 덩어리’, ‘세 개의 구멍을 가진 기계’로 인식할 뿐이다. 정신이 제거된 사물화된 여성에게는 정서와 의견이 도출될 수 없으므로 저항하면 폭력으로 제압하는데 린다는 매를 맞았지만 심하면 살인까지 당한다.이렇듯 여성의 성을 지배한 남성들은 윤간 판타지부터 강간까지 다양한 성적 욕망을 소비한다. 여성의 성착취에는 인권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말한다.

바지를 내리고 서 있는 남자에게 무릎을 꿇고 앉아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성은 다만 하나의 섹스 머신 중 한 종류일 뿐이다. 물론, 어떤 성행위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행위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다. 성행위에서 완벽한 감정적 동조와 아무런 장애가 없는 평등한 합의는 쾌락의 자격으로서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포르노가 폭력적인 이유는 평등하지 못한 조건으로 성사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포르노가 폭력과 협박에 의해 추진된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렇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포르노에 뛰어든 여성의 대개가 빚과 부양가족이 있다는 공통점을 들었다. 본인이 가난하거나 가난한 가족이 있다는 말이다. 이럴 때 돈은 발 빠른 호객꾼이 되어 등장하는 법이다.

포르노 사업은 여성에게 비인간적 실체를 체험하도록 유도하지만 돈이 필요한 여성이 그것을 제어할 현실적 방법은 없어 보인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주장에 의하면 포르노는 지배와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임신과 무관한 상호적인 쾌락의 에로티카와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에로티카도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쾌락의 한계와 유용 방법을 달리하면 수긍 방향이 변경된다. 스너프처럼 성적 쾌락을 위해 섹스 도중 상대방을 죽이는 잔혹한 종류는 여성의 안전과 평등에서 완전히 어긋난다. 그래서 한숨 쉬는 연약한 독자에게 저자가 알려주는 방법이란 여성 자신이 자신의 성과 출산에 대한 자율권을 갖도록 투쟁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결론은 지루하게 들어 온 답변이다. 하지만 이 방법 밖에 현재 포르노 사업의 폭발적 위력과 그것을 악용하는 남성 소비중심의 권력아래에서는 뭔가 신통한 방법이 없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여성의 자율권 투쟁을 언급한 이유는 여성 스스로 자신의 성문제를 직시하라는 개념이다. 남성의 공격적인 성정체성에 대응한 지적이기도 하다. 흥미롭게 발견할 수 있는 점은 자본의 공격성은 남성의 발기한 페니스처럼 공격적이고 정면을 응시하며 아무 곳이나 상황되면 꽂는다! 이런 그림이 가능하다면 자본과 남성의 성기는 같은 DNA 출생이라는 것에 의심을 받을만하지 않은가. 오늘 날 자본의 위력은 더 이상 출구가 없을 정도로 만조수위상태에 이르렀고 더불어 포르노 사업은 바벨탑을 쌓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

그렇다면 여성의 성착취와 차별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과 성권력의 관계는 대담하고 때로는 은밀하게 접촉한다. 그러나 공공연한 현실이라는 점을 사회는 묵과하고 있다. 그것은 자본이 만든  ‘돈의 방패’가 견고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정말 저자가 인용한 것처럼 남자들이 월경을 하게 되어 심신으로 잠깐 방심한 틈을 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를 여성무장단체가 점령하면 가능성 있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재벌이 권력을 쥔 나라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남성에게 월경발생 사태를 가정한 이유는 두 말할 필요없이 여성의 신체현상을 남성에게 대입했을 때의 합리화, 요컨대 남성편의중심적인 시각을 지적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하게도 남자가 월경을 하고 여자는 하지 않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되면 분명 월경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남자들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월경을 하며, 생리량이 얼마나 많은지 자랑하며 떠들어댈 것이다. 초경을 한 소년들은 이제서야 진짜 남자가 되었다고 좋아할 것이다. 처음으로 월경을 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과 종교 의식, 가족들의 축하 행사, 파티들이 마련될 것이다. 지체 높은 정치가들의 생리통으로 인한 손실을 막기 위해 의회는 국립 월경불순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한다. 의사들은 심장마비보다는 생리통에 대해 더 많이 연구한다.”-(30~31쪽)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룻의 노래」편은 모든 어머니의 얘기다. 성서의 ‘룻기’편에 나오는 “어딜 가시든지 따라가겠나이다.” 하는 종속적 자아와 자신의 삶 속에 희미한 불빛으로 남아있는 신념의 갈등을 보여준다. 읽으면서 개인의 꿈을 희생하며 가족의 삶에 함몰되어 살다 간 내 어머니의 삶이 겹쳐져서 한참 울먹했다.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성 인권은 남성 인권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 접점으로 가까워졌을까.《컬러 퍼플》의 작가 엘리스 워커는 남성을 일컬어 “멀리 있는 적들의 집단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만큼 여성의 삶은 궁극적으로는 바뀐 것이 많지 않다는 의미다. 이 말은 여성을 상대하는 남성의 시선도 변한 것이 별로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 글로리아 스타이넘(지은이)/이현정(옮긴이)/현실문화연구/200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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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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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펠릭스 2011/08/08 20: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생물로서 인간이 우월되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유적인 생식력 때문이라 사려됩니다. 곧 성적 환타지를 꿈꾸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환상의 파트너가 필요했고요. 특히 여성의 몸매는 적의 대상이 아닌 품고싶은 열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생리상 남성의 정자는 일정하게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면 배출의 쾌감을 해부학적으로 느낄 수 있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 미세한 남성의 욕구를 남성 스스로 산업화하여 살찌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2. 벼리 2011/08/09 15:0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직도 사회에는 가부장적이고 여성비하적인 성담론이 팽배했다고 봅니다.
    저도 남성이지만 포르노를 마치 본능의 차원에서만 해석하는 학자들도 봤고요,
    <포르노 그라피>라는 책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여성을 아주 동물 이하로 취급하는 것을
    설명한 책입니다. 포르노의 이면, 즉 포르노를 연출하는 여성의 상황이 너무 적나라해서
    읽으면서도 불편하기도 했던 책입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그나마 양호하게 서술한 모양이군요.

    여튼,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 윤미화 2011/08/10 1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 그래피>를 말씀하시는건가요?
      몇 해 전에 읽은 책인데,
      하드코드 중에서도 상당히 심한
      (인간이 저질르수 있는 모든 행위와 방법)이 적나라해서 저도 읽으면서 구토까지 유발한 책으로 기억합니다.
      이 페이퍼에 인용할까 싶기도 했지요^^;

      건강,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더불어 팍팍한 세상에서 건강이 쵝오지요.

  3. 2011/08/10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괜한 훈수 2011/08/11 17: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보슬아치”는 남성을 가리키는 은어가 아니라 “보지+벼슬아치”입니다. 여자(보지)라는 생물학적 조건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양 행동하는 일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재수없는 년”의 대표 선수라고나 할까요.
    저는 보슬아치를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는 여성들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까까님, 일단 우리 사회의 현상에 그런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남녀 피차 일반”이라는 것은 오로지 생물학적 욕망에만 한합니다. 다시 말해서 “쥐박이나 나나 다 같은 사람이다”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적 신분의 차이가 없어져서 서로가 원한다면 아무런 조건없이 살을 섞을 수 있는 사회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가까운 사회 형태는 티벳쪽의 일부 모계사회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나라”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윤미화 2011/08/13 18: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예, 그 말의 의미가 여성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관련 은어나 비속어조차
      여성 상징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의 의미를 새삼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