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내리는 풍경 : ⓒ 강덕경[각주:1](1929~1997)



_저 뻑꾹 소리


봄 열어 가을 떨어질 때까지

저 뻑꾹 소리.


나 떠난 뒤 겨울 되면

저 뻑꾹 소리

어느 허공에 얼어붙으랴.

                         

                 -최승자. 시집《내 무덤, 푸르고》에서-





세종대 일문과에 재직 중인 박유하 교수가 쓴《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8.5 초판은 현재 절판되었고 2015년 6월 25일 펴낸 제2판이 판매중이다. 2013년 판본이 절판된 이유는 2015년 2월 17일 법원에서 삭제신청 가처분 판결이 났기 때문이다. 


가처분 판결 과정은 이렇다. 2014년 6월 16일 ‘나눔의 집’ 고문 변호사와 소장 등에 의해 위안부 아홉 명으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고소 내용은 위안부 명예훼손 형사고소와 2억 7천만 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사소송이 합쳤다. 여기에《제국의 위안부》판매금지와 위안부 접근금지가 요청됐다. 서울동부법원 민사21부가 원고 측에서 수정 신청한 53곳 가운데 34곳을 수정하라고 판결했다. 그렇게 해서 초판은 판매 금지됐고 수정한 제2판이 나왔다.


법원 판결대로 서른 네 곳을 삭제한 두 번째 판본을 읽고 서평을 쓴다. 미리 밝혀두지만 나는 박 교수 논지에 많은 부분 동의하고 공감한다. 또한 몇몇 부분은 박 교수와 생각이 다르다. 이렇게 말하면 양비론이라는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특정 대상을 논할 때 100퍼센트 좋거나 나쁘거나 그르거나 틀린 경우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물며 생각을 결집한 책이야 말해서 뭣하랴. 게다가 위안부와 같은 참혹한 역사를 다룰 때 어느 한쪽으로 치닫는 태도는 지양한다. 


위안부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려면 우리가 놓치거나 외면한 부분, 생각이 서로 다른 부분을 머리 맞대고 고심하는 상호 보완이 중요하다고 본다. 지배층의 탐욕과 무능함으로 나라를 잃고 제국의 압제에 동원되어 참담한 고통을 겪은 위안부에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미래 세대에게 우리가 무엇을 남겨줘야 하는지 좀더 많은 논의와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    *    *


▼ 강제성과 자발성

위안부를 다룬 책과 영화에서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는 모습을 쉽게 본다. 여기서 가리키는 강제성은 총을 멘 일본군이 싫다고 뿌리치거나 울부짖는 소녀를 납치하듯 끌고 가는 장면이다. 강제성이 입증받으려면 상명하복 군대 계율을 상기할 때 일본군이 조선 소녀를 끌고 가도 된다는 근거가 나와야 한다. 식민지 조선인을,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닌 20만여 명(이 숫자도 불분명하다) 을 데리고 갔다면 일본군에서 명령을 내린 문서가 발견되어야 한다. 또 하나, 문서 존재 여부와 별개로 냉정하게 말해서 ‘현장에서 일본군의 강제연행’ 증거가 증언 외에는 아직까지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의견이 나오면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일본 극우 주장과 같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강제연행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박 교수는《제국의 위안부》에서 위안부 증언을 제시하며 일본군에 의한 직접적인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한다. 혹시나 강제연행이 있었다면 위안부가 아닌 정신대 동원이었을 것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우리는 위안부와 정신대 차이를 혼동한다는 논지다. 위안부와 정신대 차이는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상세한 자료가 나오므로 생략하겠다. 강제성과 자발성 논쟁이 뜨거울 때마다 위안부 증언이 제시된다. 증언 가운데 공통점이 있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쌀밥을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아버지가 가라고 해서”, “좋은 옷을 입을 수 있다고”와 같이 돈을 벌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위안부 증언집인《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한국정신대대책문제협의회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 한국 위원회 증언팀 지음. 풀빛. 2001.8 에 따르면 의붓아버지가 포주에게 딸을 팔아넘긴 이야기가 나온다. 팔려간 딸은 다시 다른 포주에게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돈 벌어 오라고 해서 갔거나 남편이 등을 떠밀어서 위안부가 된 이도 있다. 


여기서 보듯 계급을 확인한다. 정신대가 경제 여유와 일정 수준 교육받은 집 딸을 대상으로 동원한 것에 비해 위안부는 가난해서 교육을 받지 못한 집에서 돈을 버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딸이나 아내를 위안부에 보내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까.

 

ⓒ 《제국의 위안부》발췌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1940년대 신문에 위안부 모집 광고가 실린 것을 볼 수 있다. 부모가 직접 광고를 봤거나 업자에게 권유받았을 것이다. 이런 추정이 가능한 이유는 위안부 증언 대부분이 부모 외에 면장, 이장, 동장, 동네 남자들, 또는 경찰과 함께 찾아온 업자가 말해줬다고 하기 때문이다. 과정이야 직접적 강제연행이 아니라고 해도 사기행위에서는 반론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이런 모든 ‘유혹과 사기’는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집 딸”을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박 교수는 일본군에게 “구조적 강제성”을, 조선인 공모자에게 “현실적 강제성”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박 교수가 “일본군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발언 배경에 조선인 업자와 포주가 있음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자발성인가? 정말 일본군은 위안부 모집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일까? 박 교수는 신뢰할만한 일본군 문서가 없다는 이유로 자발성에 무게를 두지만 1980년대 위안부 연구를 하던 일본인 교수가 발견한 문서에는 엄연히 일본군 위안부 모집 명령서가 있음이 밝혀졌다. 이 자료는 1992년 1월 11일 아사히 신문에 “위안소 군 개입 자료 발견”이라는 기사로 처음 실렸다. 군 수뇌부가 위안부 모집을 명령했고 국장들이 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따라서 “군의 수요를 알게 된 업자들이 사기를 써서 모집했고 일본군이 묵인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단속했다.”고 한 박 교수 주장은 틀렸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묵인”과 “공식적 단속”은 모든 협작 배경이며 비공식 사건을 은폐하는 공식 절차이다. 따라서 ‘묵인’은 방조죄에 해당하는 범죄이다.


  

▲ 1938년 3월 4일 일본군 위안부 모집 명령서



▲ 1992년 1월 11일 아사히신문 위안소 부대에서 직접 지시 기사




▼조선인 협력자/공모자들


마음이 불편해도 조선인 협력자를 조금 더 들여다보자.《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에는 조선인 업자 또는 포주는 위안부 모집부터 성매매 행위까지 강제한 장본인으로 지목된다.

 

“문 앞에서 돈 받은 놈” 혹은 “우리 밥주구 옷 입히구 또 우리 데리구 거까지 간 놈”, 또 데려간 비용을 요구하며 “벌어 갚으라”고 했고 “도망-폭력-감금”했다. “항의에도 폭력을 행사”했다.” 박 교수는 “손목을 나꿔채며 가자고 했다.”는 조선인 업자를 가리켜 “강제로 끌어간” 주체가 다름 아닌 우리 안에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한다.

 

《제국의 위안부》에 따르면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또는 일본을 가리지 않고 조선인 포주(또는 일본인 포주)가 군대 이동을 따라 함께 따라다녔다고 한다. 군인에게 받은 화대는 포주가 관리했다. 해방이 되고 조국으로 돌아오면서 위안부들이 수중에 돈이 없었던 건 포주가 갈취했기 때문이다. 위안소에 있을 때 조선인 포주는 위안부에게 매질을 하거나 폭언을 했다고 한다. 말을 안 들으면 쇠꼬챙이로 때리거나 낙태를 시키는 일도 포주가 맡았다.

 

오죽하면 “일본군보다 조선인 포주가 더 죽이도록 미웠다.”고까지 증언한다. 타국에서 처절한 삶을 견디는 위안부가 같은 조선인에게 받은 학대는 그 절망감이 더 참담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이나 지원 관계자들은 조선인 공모자를 조명하지 않는다. 치부를 감추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런데 증언이 널리 퍼진 상황에 왜, 누가, 무엇 때문에 불편한 진실을 묻으려는 것일까. 


▼“동지적 관계”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 저널리스트 센다가코(千田夏光)가 쓴《목소리 없는 여성 8만 명의 고발, 종군위안부(声なき女”八万人の告発)》를 기저로 삼았다. 센다가코는 1970년대 한국을 방문해 위안부 증언을 직접 채록했고 위안부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40여 년 전 아직 사십대에 있었던 위안부들은 그동안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다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에게 처음으로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같거나 처음 듣는 이야기가 섞였다. 한마디로 지옥에서 절규했던 위안부 이미지를 흔든다.

 

박 교수는 “민간인 위안소에서 일했다.”는 위안부 증언에 따라 사창이 있었다고 정리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판자벽을 사이에 두고 작은 침대 한 개와 모포 한 장이 있던 위안소가 아니다. 민간에 있던 사창 풍경은 이렇다. 여자들은 손님이 오면 한명씩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술을 마시고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고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손님은 장교나 병사는 물론 민간인까지 받았다. 여자들은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이 섞였는데 이들은 포주 관리를 받았다. 박 교수는 사창에서 일했던 여자들을 위안부로 보지 않는다. “다른 상황에 처해 있던 여성들을 똑같이 ‘위안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위안부 논쟁에서 가장 예민하게 거론되는 이야기가 “매춘”이다. 증언에서 보는 것처럼 사창의 존재는 위안부 정체성을 혼동시킨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처참한 모습에서 벗어난 것 같기 때문이다. 전쟁은 어느 특정 세력이 사익이나 권력독점을 전횡하는 수단으로 일어난다. 두 말할 필요 없이 군인은 살상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이다. 국가에 강제 동원되어 죽임을 당한다는 점에서 피해자이다. 개인 원한 없이 불특정 다수를 죽여야 하는 가해자이다. 물론 모든 책임은 전쟁을 일으킨 국가에 있다. 그러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살상과 폭력행위가 정당하게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살상과 폭력은 반인륜적이며 비도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애 감정을 느꼈다.”고 한 위안부가 있다고 해서 위안부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적군에게 쫓길 때 돈과 식량을 주고 숨어 있으라고 한 일본군이나 해방이 가까워오자 차비를 주면서 고향으로 돌려보낸 일본군은 아직 인간에 대한 예의가 남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일본군과 위안부 관계를 너무 디테일한 조각에 할애한다. 본인이 “총체적으로 위안부 증언을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해놓고 말이다. 위안부 본질은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한 식민지 여성 성폭력’이다. 사창에 소속되었거나 견딜만한 대우를 받았다고 해도 성착취임을 부정할 수 없다.

 

박 교수가 이 책에서 거듭 제시하는 “위안부를 위하는 군인” 사례는 성착취 대상인 위안부에 대한 연민은 아니었을까? “대리고향이자 가족”이며 “같은 일본인(식민지 조선인 국적은 일본이었으므로 조선인 위안부 국적은 일본이다)으로 죽음의 공포에 함께 직면하고 조국을 위해 일하는 동지적 관계”라는 박 교수의 자의적 판단은 사실 관계를 흐려놓을 우려가 있다.

 

평소에는 성을 제공하고 전투 후에는 간호부 역할을 하며 피묻은 전투복을 빨아주고 옷을 꿰매주는 관계는 ‘동지’ 관계였다기보다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 병사와 식민지 조선 여성의 수직관계이다. 일본군 입장에서(위안부 입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이 관계가 동지 관계로 성립하려면 위안부에게 성을 제공하는 요청을 중지해야 하고 다른 노동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위안부가 심신미약 상태에서 고통을 호소할 때 일본군은 안전하고 깨끗한 의료처방을 위안부에게 제공해야 한다. 무엇보다 포주의 착취와 폭력으로부터 위안부를 보호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거나 “조센삐”, “공중변소”라는 멸시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동지는 평등한 조건에서 차별 없이 권리를 누리고 수평적 정서를 교류할 때 성립된다. 조선인 위안부를 대하는 일본군 태도는 “차별감정”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부족한 간호부 대체까지 행사했다는 점에서 철저한 노동착취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조선인 위안부들의 다면성이 있었음을 직시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아픈 위안부에게 약을 타다 주거나 관계를 갖는 대신 좋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심리적 안정을 도와준 일본군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선물을 사다 주고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전쟁터에서 서로 의지한 증언도 소중하다. 조선인은 무조건 피해자이며 일본군은 불천지 원수와 같은 대립각만으로는 다양한 위안부 실체 파악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위안부 개인이 겪은 기억이 획일화로 뭉뚱그려져 존중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박 교수가 말한 ‘동지적 관계’로 일본군을 기억하는 위안부가 있더라도 위안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개인의 경험은 각자 소중하고 위안부 기록에 반영되어야 하지만 인간존엄성이 참혹하게 짓밟혔다. 따라서 숨기고 싶은 처절한 고통을 스스로 위로하고자 하는 어떤 심리가 작동한 것이 아닌 한 ‘동지적 관계’가 가능한지 의문이다. 지옥에서 견디기 위한, 살아내기 위한 실낱같은 자위 감정은 아니었을까? 만에 하나 박 교수 말처럼 ‘동지적 관계’로 인식하고 아무 의심 없이 일본군의 배려에 감동한 위안부가 있었다면 대체 위안부 인권의식 수준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사죄와 보상

무라야마 정권은 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을 조성했다. 국가보상으로 조성하려고 했지만 사회당 출신 각료 반대에 부딪쳤다. 논란과 논쟁을 거쳐 1995년 7월 ‘츠구나이(償い·위로)[각주:2] 사업’을 실시했다. 겉으로는 민간기금처럼 보였지만 국가에서 지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면하기 위해 민간기금처럼 발표했다. 52억 엔 가운데 46억 엔이 일본 정부가 지출했다고 한다.

 

1965년 한일협정 때 위안부 보상금 지급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못한 건 한국 정부 불찰이다. 미국 압력에 의해 서둘러 맺은 한일협정은 식민지배 피해 보상금을 포항제철 설립 비용에 사용했음이 뒤에 밝혀졌다. 위안부 피해 파악조차 못했던 한국정부는 보상방식이 아닌 경제협력 형태로 수령을 한 셈이다. 게다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합의했다. 일본이 위안부 보상금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1965년 한일협정을 들먹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더라도 일본은 적잖은 보상금을 그동안 위안부에게 지원했다. 한국 정부도 1970년대 위안부 실태 조사를 시작하면서 지원했다. 지금도 일본 민간단체에서 지원금이 지급된다고 한다. 그러나 개인이 청구할 권리마저 박탈당하는 바람에 일본 법정에서 위안부가 패소한다. 보상 문제와 함께 사죄 또한 같은 맥락에서 다뤄져야 한다. 보상과 사죄는 개인과 일본 정부를 구분하여 책임 문제(법적 책임은 아쉽지만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가 따른다. 


▲ 1970년 12월 7일 바르샤바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총리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떠올린다. 진정성과 빌리 브란트.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 앞에 당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꿇고 짧은 기도를 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저지른 학살에 독일 정부를 대신해 잘못을 속죄한 것이다. 용서는 참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일본 정부에서 “유감”이나 “심심한 사과”를 아무리 언급해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는 건 진심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노 담화와 아시아 여성기금 수령자에게 보낸 일본 총리 사죄 편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박 교수 생각과 다르게 나는 고노 담화문을 일본 정부 사죄로 보지 않는다. 국정 최고 결정권자이자 책임자는 총리다. 총리가 아닌 장관 수준에서 발표한 사죄는 식민지배 문제를 축소하고 서둘러 매듭지으려는 태도이다. 마찬가지로 아시아 여성기금을 수령한 한국인 위안부에게 총리가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사죄는 기금 수령자에 한정된 사죄였다. 


2015년 8월 27일 하토야마 전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추모비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전 총리의 사죄는 일본 정부를 대표할 수 없다. 총체적 참극을 일으킨 장본인이 일본 제국이었음을 상기하면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현 총리 정면 사과만이 위안부와 한국인에게 인정받을 것이다. 아무 조건 없이, 정치 공학 계산 없는 태도 말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그것이 아닌가.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위안부’라는 존재를 통해 드러난 ‘식민지배’ 문제임을 말하고,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 식민지배에 대한 사죄가 포함되지 않았기에 그런 한일협정을 보완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한일기본조약 자체를 흔드는 어려운 사태를 감수하지 않고도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때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고 지배하는 기간에 희생당했던 수많은 사람들-3•1 독립만세운동, 간토 대지진, 병사로 동원되어 참가한 전쟁, 고문 등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한 진심을 그 ‘사죄’ 속에 담아야 한다.”-《제국의 위안부》

 

*    *    *


나 역시 일본제국주의를 대할 때마다 민족감정이 작동한다. 그것은 내가 일본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태어나 식민지 폐해를 교육받고 자란 피해자 감정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할 때는 가치 판단 이전에 사실 관계 확인이 필요하다. 누군가 옳다고 주장한 게 사실이 아닌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밝혀진 사실이 진실일 경우 말 그대로 ‘불편한 진실’이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 서평에서 박 교수 논지를 반박했지만 “실은 그 옛날의 ‘강제로 끌려간 소녀’도 지금의 투사도 ‘위안부’의 전부는 아니다. ‘위안부’의 그 모든 모습을 보지 않고는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박 교수 의견은 지지한다. 그것은 우리가 몰랐거나 의도적으로 은폐했던 자화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나 대통령조차 위안부를 위로하고 이 문제에 관해 일본과 대화를 적극 시도한 일이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0월 8일 방일 기간 중 가진 NHK TV 기자회견[각주:3]에서 과거사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고 말했다. 피해자와 일별없는 대통령의 일방적 결정이었다. 심지어 지원 관계자들끼리 정치 이해관계로 득실을 따지며 권력투쟁을 한다. ‘역사의 고통’을 계산하며 이익을 취하려 한 것은 없는지 지금이라도 자문해야 한다. 나아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울 삼아 우리가 저지른 베트남전이나 미군 기지촌과 같은 만행 앞에서 속죄해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한 시대와 특정국가 문제가 아니다. 민족을 넘은 식민제국의 문제이며 돈이 관여한 자본주의 문제이자 인간존엄성을 말살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자기극복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안부 문제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 문서 자료를 첨부하느라 글을 수정했습니다.(3월 2일)








  1. 위안부 할머니. 관련도서로 <그림 속으로 들어간 소녀>가 있다. [본문으로]
  2. “기금이 쓴 ‘쓰구나이償い’라는 말은 ‘보상補償’이라는 말과 구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로는 補償은 compensation, 償い는 atonement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atonement 라는 말은, 종교적인 단어로 속죄,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갖는 영어입니다. the 를 붙여 대문자로 the Atonement 라고 쓰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기금 사업은 사죄에 근거한 행위라는 것을 전하려 했던 겁니다. 영어로 설명을 들은 필리핀과 네덜란드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다른 곳보다 더 이해해준 것은 이 부분과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어로는 補償도 償い도 다르게 번역할 수 없어서 똑같이 ‘보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와다 하루키 [본문으로]
  3. 1998년 10월 8일 일본을 방문 기간중에 김대중 대통령은 무라야마 내각이 추진한 '아시아 여성기금'을 지지하며 기자 회견과 오오사카 교포 간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다시금 양국의 과거의 역사에 대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자 한다. 국민은 언론의 자유가 있지만, 정부, 여당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해 나가고자 한다"라고 언급했다.22) 그리고 같은 날의 NHK TV와의 좌담회에서는 "역사인식의 문제가 일단락 됐다고 보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일단 그렇게 됐다고 생각한다. 한국 국민과 저는 이 문제가 더 이상 재론되지 않고 21세기를 향해 의논하자는 방향으로 가자는 생각이다"라고 답변했으며,23) 10월 9일 오오사카에서의 동포와의 간담회에서는 "일본은 과거를 직시하고, 잘못된 것을 사죄"하였으며, "일본측의 완전한 사죄를 받아내었"으므로, "이제 한·일관계는 20세기에 시작했던 불행을 이번 공동성명과 더불어 20세기말로서 끝맺고 21세기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출처 : 동아일보. 1998년 10월 10일자 기사. [본문으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윤미화
TAG

트랙백 주소 :: http://pporoo.khan.kr/trackback/389 관련글 쓰기

  1. Subject: ‘보상’과 ‘속죄’

    Tracked from Bluefox's 뻥 Magazine 2016.03.02 20:25  삭제

    2월 18일 목요일흐리고 바람 많이 불다 엊그제 읽은《제국의 위안부》에서 나온 ‘つぐな(償:갚을 상, 보상할 상)い’(쓰구나이: 네이버에서는 ‘츠구나이’로 검색된다) 가 계속 생각난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2016.03.01 2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형사처벌은 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고있고 제국의 위안부 책이 일본혐한우익파에 봉사하는 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 윤미화 2016.03.02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논란을 일으킬 내용은 있지만 위안부 할머니들 명예를 훼손했다고는 보지 않으므로 형사처벌은 저도 반대합니다.

  2. 박민인 2016.03.02 07: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국의 위안부는 일본 월간지에 일본어로 먼저 연재 되고, 한국에서 단행본이 출판된 뒤, 일본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된 고도의 기획서입니다. 이 책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것이 한줌이라면 일존 우익에게는 천군만마였습니다. 당장 유튜브에 박유하를 검색해 보세요. 그들이 우리 우리 사회의 일부에서 옹호하는 박유하를 어떻게 철저히 이용하는 지를. 그리고 우리 사회는 학문의 자유와 피해자 인격 모독이라는 격론을 벌이고, 우읻화 되고 있는 일본은 이를 또 철저히 이용하고, 박유하는 피해자인척 하고 있습니다. 일본 우익이 얼마나 한심한 나라로 보겠습니까. 그러면서 진정한 사과를 요구 하다니요.

    • 윤미화 2016.03.02 14: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논란 부분을 어떻게 사실관계 확인을 입증하는가가 관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3. 딸기21 2016.03.11 1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시 언니의 글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