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4.3’ 항쟁을 처음으로 다룬 소설은 《순이 삼촌》(현기영 지음. 창비. 1978년 초판. 2006년 재판)이다. 출판사 책 소개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978년 「창작과비평」에 발표하면서 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킨 '순이삼촌'은 그간 금기시되던 제주 4.3항쟁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학살현장의 시쳇더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고통스런 내상을 안고 30년 동안을 살다가 자살한 '순이삼촌'의 삶을 되짚어가는 과정을 통해 참담했던 역사의 폭력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간섭하는지 잘 보여주는 역작이다.

4.3 당시 초토화된 마을과 부역.폭력에 시달리는 주민들, 가족의 이산과 죽음 등이 처참하게 그려지는 '도령마루의 까마귀', 4.3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개인의 운명을 당대적 의미로 재해석하고 복원하는 '해룡이야기', 어린 화자의 의식세계로 토벌대를 피해 입산한 아버지를 묘사한 등단작 '아버지' 역시 역사와 개인의 아픔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낸 작품들이다.”

 

1978년 소설을 발표하고 작가는 고초를 겪는다. 제주 4.3 항쟁을 알리는 기폭제가 된 《순이 삼촌》으로 인해 정보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받는다.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한쪽 귀가 안들린다고 한다. 1978년, 1979년이면 유신독재가 마지막 절정을 보이던 즈음이다.

 

《순이 삼촌》이 군사독재 정권 눈 밖에 난 이유는 소설에서 남로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남로당 당원출신이다. 군사독재 시절 남로당은 정권에게 금기어였다. 북한에 적대감정을 돋우기 위해 라디오에선 성우 박정자가 굵고 무거운 목소리로 남로당 대남 공작 연속극을 들려줬다.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하게 된 계기는 1947년 3.1절 기념식 때 경찰 발포로 시민 여섯 명이 죽은 것에서 시작한다. 무고한 죽음으로 제주도 전 직장이 3월 10일 총파업을 했다. 당시 미군정청 하지 중장은 수사 결과, ‘경찰 발포로 인한 주민의 반감과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둔다. 남로당원 색출을 목적으로 경찰 발포를 축소했다.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봉기 계기로 미군정 수뇌부는 도지사를 비롯해 외지인 출신으로 기관장을 교체한다.

 

기관장 뿐만 아니라 지원경찰과 서북청년단까지(이하 서청) 육지인으로 교체했다. 서청은 북한(주로 평안도) 출신으로 해방 후 김일성이 단행한 친일파 색출과 재산 몰수에 동의하지 않거나 친일 행적으로 정치, 경제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남한으로 내려와 만든 보수우익단체다. 서청 초기 구성원은 김일성 체제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불만이 많은 지주 출신, 개신교 신자로 구성됐다. 종교와 정치신념을 일치했다는 점에서 이승만과 동일한 개신교 신자로 종교성향이 동일했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자의반, 타의반 주류에서 밀려났다고 여긴 이들은 북한과 적대관계에 돌입했다. 

 

따라서 서청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재산과 명예를 강탈한 주적이었던 셈이다. 이와같이 극우성향 서청을 제주도민 진압 목적으로 투입한 것은 이승만이다. 이승만이 서청을 제주도 진압에 이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제주도를 군대 개입 없이 해결해서 선거에 승리하고 정권을 잡자는 속셈이다. 서청은 제주도 토벌을 성공한 이후에도 육지로 올라와 온갖 정략에 활동하면서 이승만 임기 말년까지 행보를 같이했다.

 

정리하면 이렇다. 4.3항쟁은 1947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말을 탄 경찰이 구경 나온 한 아이를 치고 그냥 달아났다. 화가 난 도민들이 관덕정에 모여 항의를 했다. 해산 명령을 어긴 도민을 향해 경찰은 발포했고 도민 여섯 명이 죽었다. 도민은 항의 차원에서 총파업을 단행했다. 그러자 미군정청은 남로당 제주도당 선동으로 몰아 붙인다. 이승만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육지에서 투입한다. 경찰과 서청은 파업 주모자 검거 한 달만에 주민 5백여명 을 무단 체포했다. 1년 동안 진행한 이 검거작전으로 2천 5백여명이 구금됐다. 그리고 남로당 당원 색출을 빌미로 대주민 테러와 고문이 자행됐다.  

 

4.3항쟁이 발발한 1948년 4월 3일까지 육지에서 파견 된 경찰은 서청과 함께 온갖 만행을 일삼았다. 부녀자 납치와 강간을 일삼고 주민 재산을 강탈했다. 오죽하면 과년한 딸이 있는 집은 육지 출신 경찰에게 첩실로 들여 강간 수모를 피하려고 했다고 한다.

 

마침내 남로당 제주도당과 주민은 경찰과 서청 만행에 봉기를 했다. 1948년 4월 3일 경찰서 습격이 있은 후 정부는 경찰 1천 7백여명과 서청 5백여명을 투입했다. 일명 '초토화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해안선 5km 밖 사람들을 폭도로 간주했다. 그러나 게릴라식 전술을 사용한 남로당은 거센 저항을 했다. 진압이 어려워지자 정부는 일본군 출신 송요찬 대장을 필두로 군대를 보낸다. 또한 친일 고등계 경찰 출신 조병옥(전 국회의원 조순형 부친) 경무부장은 일제 강점기 고등계 형사 출신 최난수 경감을 특별 수사대장으로 임명했다.

 

5.10 단독 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루고 싶은 이승만과 이승만을 앞세워 남한정부를 장악하려는 미국 입장에선 제주도 소요사태가 눈엣 가시였다. 미군정 정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남한 경찰이 저지른 야만적인 테러를 알고도 묵인했다고 한다. 미군정 통신부는 도민 테러가 자행되는 제주도를 공중에서 촬영하고 제주도민 70%가 좌익이며 동조자로 본국에 보고했다. 따라서 미국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무차별 학살을 묵인하고 방조한 공범자다.

 

조병옥 경무부장이 파견한 일제 고등계 경찰 출신 최난수는 일제강점기 때 여자를 나체로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는 걸 즐겼다고 알려졌다. 잔혹한 고문으로 범인을 색출하는 고문기술자 최난수는 제주도에서 일제 치하 경험을 발휘했다. 임신부 양쪽 팔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경찰 3명이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도주한 오빠를 대신해 끌려온 여성은 고문 끝에 나체로 옷을 벗겨 철창으로 찔러 죽였다.

 

남편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빨갱이 의심을 받던 임신부에게 불에 달궈진 뜨거운 총구로 아래를 지졌다. 여자가 실신하자 밭에 내다 버리고 머리에 휘발유를 끼얹어 불에 태워 죽였다. 자식이 보는 앞에서 부모를 총살하고 지켜보는 자식에겐 춤을 추고 박수를 치라고 강요하는 것도 모자라 그 자식마저 죽창으로 여러 번 찔러 죽였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아이 뜬 눈을 다시 찌르라고 명령했다고도 한다.

 

《순이 삼촌》에는 이런 잔혹한 장면 외에 마을을 불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이북 출신 장교가 주민을 모아 놓고 마을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한다. “잘 들으라요. 우리레 지금 작전 수행둥에 있소. 여러분의 집은 작전명령에 따라 소각되는 거이오. 우리의 임무는 여러분을 모두 제주읍으로 소개하는 거니끼니 소개등 만약 질서를 안 지키는 자가 있으문 아까와 같이 가차없이 총살할 거이니 명심하라우요.” 불타는 마을에 남아 있을 수 없던 주민들은 단봇짐 하나 챙기지 못하고 경찰이나 병력을 따라가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유명한 북촌마을 대학살에선 주민 3백 여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2008년 국방부 불온도서로 지정된《지상에 숟가락 하나》에는 관덕정 앞에서 거행된 참담한 즉석재판 장면이 나온다. 관덕정은 1448년 세워진 군사훈련청이다. 이곳은 대원군 때 병인박해로 인해 많은 천주교 신자가 희생된 곳이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관덕정은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게시하기에 알맞은 장소였다.

 

영문도 모르고 밭에서 일하다가 끌려온 사람들이 단상에 올라 하지도 않은 죄목에 엉터리로 대답하면 즉석재판은 끝났다. 시인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은 순진한 사람들이다. 군사 즉석재판 이틀 만에 343명이 사형 당하고 시신은 버려지거나 암매장했다.

 

희생된 주민 머리를 잘라 꼬챙이에 꿰어 효수했다. 장발 머리에 핏기가 바래져 하얗게 변한 얼굴과 불에 그슬려 까맣게 된 얼굴과 살점이 너덜너덜한 머리통이 관덕정 주변에 세워졌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 따르면 어떤 경찰은 잘린 주민 머리를 자기 허리통에 매달고서 당당하게 시내 행진을 했다고 한다. 4.3 항쟁에 투입된 병력은 한국군 2,622명, 경찰 1,700명이다.

 

작가 현기영은 학교 가는 길목에 있던 관덕정 앞을 지나갈 때마다 자기 목을 만졌다고 한다. 어림추산해서 160여개 부락에 희생자 3만명을 낸 ‘피바람’은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빨갱이 소탕작전’ 이름을 붙여 이어졌다.

 

 

 

 

현기영이 소설 제목을《지상에 숟가락 하나》로 정한 이유가 짙은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두 팔을 벌린 채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 한쪽 입귀에서 흘러내리다 만 핏물 줄기가 엉겨 있었지만 표정은 잠자는 듯 평온했다.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 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68~69쪽)

 

이 시신은 '장두'라고 불린 당시 무장대 총사령관 이덕구다. 장두(狀頭)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①여러 사람이 연명(聯名)으로 제출하는 소장(訴狀)의 맨 처음에 이름을 적는 사람. ②과거의 급제자 가운데 장원(壯元). 장두 이덕구는 1949년 6월 체포 되어 관덕정 앞에서 십자가에 묶여 최후를 맞이했다.

 

나는 2006년 2월에 관덕정 맞은편 로베로 호텔에 일주일 간 여장을 푼 일이 있다. 낮에는 제주도 일대를 구경하고 들어와 저녁에는 관덕정 담벼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하릴없이 반복해서 걸었다. 호텔 인근 삼도2동 중앙성당에서는 새벽마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을 깨우는 성당 종소리를 들으며 어둠 속에 그늘을 드리운 관덕정을 창가에 앉아 바라봤다. 돌아오기 하루 전에는 호텔에서 나와 새벽 기도를 다녀왔다.  

 

《지상에 숟가락 하나》에는 경찰과 서청에 가려진 ‘민보단(民保團)을 한다. 민보단은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경찰에 협력해 주민을 통제하는 주민자치운동기구로써 출범한 향보단(鄕保團)’을 계승한 조직이다. 민보단은 토벌대를 죽창 들고 따라 다니는 경찰 하부 조직으로 민간인으로 구성됐다. 경찰과 병력은 생포한 사람을 민보단에게 죽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이 민보단과 같은 민간협력 단체를 구성해 관리한 이유는 이렇다. 민보단이 동족을 죽인 약점을 잡아 정부에 저항하지 못하게 만든 꼼수다.

 

사람을 처형하지 못하는 마음 약한 민보단에게 경찰이나 군대는 총을 들이댔다. 그런데 죽창으로 찔러도 사람이 단박에 죽지 않으므로 죽창질을 여러 번 한 후에 불에 태워 죽였다. 경찰 지시를 받아 남로당 출신 빨치산과 도민을 죽인 민보단은 4만여명이 활약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민보단은 1950년 7월 28일 이승만이 대통령령으로 해체시켰으나 ‘대한청년단특무대’로 이름과 조직을 개편해 이승만 정권 전위부대로 활약했다.

 

이 모든 참극은 ‘국가를 위해서’ 라는 호명하에 치러졌다.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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