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만난 건 1970년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네 개의 다리와 미닫이문이 달렸던 흑백텔레비전 속에서 그녀는 블라우스 단추 두 개를 풀고 노래를 불렀다. 낙타처럼 긴 검은 속눈썹을 붙이고 립스틱을 진하게 바른 입술에선 달콤새콤한 사과즙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촉촉했다. 단정한 옷차림에 조신한 몸놀림을 하는 여인들을 보고 자란 나로서는 ‘입을 다물수 없는 전기 충격’이었다. 온 몸 세포가 부르르 들고 일어났다.

 

내 집안은 비록 빚더미에 쌓여 곤궁한 살림살이였지만 종가의 대를 잇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는 종가 따위는 헌신짝처럼 버리기 시작한 시대다. 조상을 극진히 모시고 효(孝)와 인(仁)과 덕(德)을 실천하며 사람에게 예(禮)를 다하는 종가의 대의명분이란 것이 자식을 학교에 보내고 부를 취하고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는 일과는 상관없었다. 게다가 먹고 사는 일엔 하등 보탬이 되지 않던 시대였다. 산업화에 맹주하던 1970년은 전통과 구습이 자본의 삽질아래 섞이고 흩어져 묻혔다.

 

여느 종갓집처럼 내 아버지도 고려부터 조선까지 왕비를 다수 배출한 집안을 거론하며 종종 ‘가문의 자긍심’을 설파했다. 다달이 빚 독촉장이 날아와 어머니의 불면과 소화불량을 유발했지만 낡은 족보와 문집 몇권을 간직한 아버지의 ‘종가 허세’는 돌아가실 무렵까지 사그라지지 않았다. 평생을 몰락한 양반가의 허울을 벗지 않았던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백꽃송이 뚝 떨어지듯 어느 날, 오전나절에 돌아가셨다. 개나리꽃이 막 꽃봉오리를 여는 쌀쌀한 꽃샘바람이 불던 무렵이다.

 

아버지는 영면하시기 전,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갈 즈음부터 조금씩 변했다. 어머니가 다니는 교회를 일요일마다 같이 가시고 늦둥이로 낳아 풍족하게 키우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렇다고 오만가지 제사의례를 물린 것도 아니고 한밤중까지 사랑방에 객을 불러들여 밥상을 냈다. 지난한 내 어머니의 인생은 그 시대의 다른 여인들처럼 제도와 관습과 종부라는 이름하에 순종과 인내를 강요받았다. 몇 번의 연애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혼을 하지 않은 몇 가지 원인 가운데 하나는 가부장적이고 남성권위적인 경험에 기인한 것인 듯싶다. 

 

여하 간에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갓 열 살 즈음의 어린 것은 풍기가 방정하지 않은 그녀를 첫 목도한 이래 몸이 달떴다. 높은 콧소리에 뱀처럼 느물느물 몸을 꼬며 노래를 부르던 그녀 이름은 김추자.

 

 

 

2002년 11월 급성 간암으로 작고한 문화평론가 이성욱은《쇼쇼쇼-김추자, 선데이서울 게다가 긴급조치》에서 “김추자 이전에 가수 없고 김추자 이후에 가수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는 김추자의 시대였다. 종가의 전통예의 범절이나 제례 따위가 범접할 수 없는 파격과 돌발의 문화가 범람했다. 통속이 넘쳐 ‘후끈한 저속’이 세속을 장악했으니 효와 예를 논하는 집안에서 김추자는 불온한 금지대상이다. 그러나 발칙한 김추자는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도발을 부추겼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을 지으실 때 텔레비전에 나오는 김추자 노래를 따라 불렀다가 부지깽이로 얻어맞는 것도 모자라 거울 보며 춤까지 흉내 냈다. “술집 나가는 것 같은 여자 흉내나 내고 네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 어머니 립스틱을 몰래 바르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춤을 추는 고명딸은 종아리를 맞았다. 나에게 회초리를 든 날, 어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만드신다면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으셨다.

 

고명딸을 향한 과도한 애정과 기대로 인하여 ‘빨간 딱지’가 붙은 김추자는 입에 올릴 수 없는 폐인의 이름이 되었다. 그렇다고 세상이 죽으라는 법은 없어서 김추자는 이미 고등학생이거나 사회인이 된 오라버니들의 책상 서랍 속에서 더욱 ‘은밀하고 농염’한 자태를 뽐냈다. 오라버니들은 나팔바지를 입은 김추자 브로마이드를 구해서 돌려봤다. 블라우스 아랫단을 묶은 탓에 김추자의 팽팽한 둔부가 적나라했다.

 

가끔 큰 오라버니가 가방 안에 숨겨오는 주간지《선데이서울》에선 김추자의 소식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가슴골이 훤히 드러나는 하얀 살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가 방문을 열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몰래보던《선데이서울》은 어느 날 브로마이드와 함께 장렬히 화형 당한다.

 

 

오라버니들이 학교에 가거나 회사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후, 뒤란에서 행해진 참극으로 인해 나는 꽤 오랫동안 김추자를 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내가 중딩에 입학 할 무렵 큰 오라버니 방에서 숨겨있는 김추자 LP판 앨범을 발견했다.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지만 흥분을 가라 앉히고 시치미를 뚝 뗐다.

 

집에 혼자 있는 낮 시간을 호시탐탐 노리는 새끼여우처럼 큰 오라버니 방에 살금살금 드나들었다. 김추자는 수십 장의 앨범 가운데 거꾸로 꽂혀 있었다. 발각을 대비해 오라버니가 나름 자구책을 취한 것이리라. 어머니가 집을 비우기 바쁘게 후다닥 큰 오라버니 방으로 달려갔다.

 

강아지가 축음기에 귀를 대고 앉아 있는 상표가 붙은 전축의 볼륨을 높이고 호떡만한 헤드폰을 썼다. 끈적끈적하고 질척질척하고 새큰달큰한 김추자는 마약이었다. 그것도 영구중독 경성마약이었다.

 

내게 씻을 수 없는 흑역사를 만든 김추자는 1969년 대학 진학을 위해 춘천에서 서울로 올라온다. 춘천여고 재학 중에는 ‘향토 가요제’에 출전해 ‘수심가’를 불러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배뱅이 굿의 1인자 이은관 선생으로부터 호평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내리 반장을 지냈던 김추자는 춤과 노래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김추자는 춘천문화방송 합창단, 무용학원, 노래학원을 다니며 기초실력을 다졌다. 심지어 탈춤과 국악에도 관심을 갖고 시도했다. 운동에도 재능이 뛰어나서 고등학교 때는 배드민턴과 기계체조 강원도 대표선수로도 활약했다. 자신감을 얻자 가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김추자는 당대의 기타리스트 대가 신중현을 형부의 소개로 찾아간다.

 

신중현은 첫 눈에 반했다. 애절한 듯 하면서도 떨리는 ‘밝은 바이브레이션’, 폭발적인 가창력은 가요계의 지각변동을 예고했다. 한 마리 야생마 같은 김추자는 1969년 가을, <늦기 전에>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발표한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당시 베트남전에 젊은 아들과 남편과 친구들을 보냈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노래는 전쟁터에서 생사의 갈림 길에 놓인 병사와 고국의 가족에게 희망의 노래가 된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매일 라디오 방송을 탔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이제서 돌아왔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웃으며 돌아왔네.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모두 다 안겼네.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 동네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모두 다 기웃기웃.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온 동네 잔치하네.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믿음직한 김상사. 내 맘에 들었어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김상사는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지붕과 담장과 골목을 지나 동네로 퍼졌다. 그러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생각보다 돈을 많이 못 벌었다. 더구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폭음으로 세월을 흘려보내다가 일찍 죽었다. 우리 동네 살던 어떤 김상사 실화는 이렇게 끝난다. 김상사는 사람을 죽인 대가로 번 돈을 흐지부지 날렸지만 김추자는 이 노래로 돈을 많이 벌었다. 마침내 신예를 거치지 않고 곧장 인기가수 대열에 오른다.

 

 

소설가 김훈은 에세이《‘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에서 김추자의 목소리를 이렇게 평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결코 애절하지 않고 강력하다. 김추자는 어떤가. 김추자는 어지럽다. 김추자 목소리의 본질은 환각과 도발이다. 김추자의 여성성은 내연기관처럼 끊임없이 폭발하고 배기한다. 이 폭발의 절정이 음악적 기율로 통제될 때가 김추자의 가장 좋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라고 한다.

 

김추자의 허스키한 음색과 터질 것 같은 팽팽한 몸은 섹스어필한다. 발목까지 꽁꽁 싸맸던 유교의 이불 속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김추자에게 풍기문란을 물었다. 김추자는 이제까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별경(別境)이었다.

 

심지어 딱 붙는 가죽재킷에 골반바지를 입고 복부와 엉덩이를 드러낸 김추자는 요물이자 악마였던 것이다. 사이키델릭한 김추자의 음색과 의상은 당시 암울한 정치상황과는 완전히 상반된 발랄함이자 도발행위였다.

 

군사독재가 서슬 퍼런 칼바람이 전횡 할 때 김추자는 파격, 그 덩어리 자체였다. 정치적 억압과 사회 통제 속에서 김추자는 혈기 분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표현의 자유를 넘어섰다는 이유로 그녀 자신마저 억압당하기에 이른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호출했지만 김추자는 불응했고 이 때부터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 춤출 때 손동작이 간첩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것이다. 급기야 1971년 폭력배 출신의 매니저에게 청혼을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다. 3회에 걸친 안면부 복원 수술을 받고 김추자는 예정된 공연을 치렀다. 하지만 투혼을 발휘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인공포증 증세가 깊어졌다.

 

그리고 1975년 한국 가요사에 기록될 대마초 파동에 연루되어 1년여 간 활동을 중단한다. 1975년은 육영수가 총탄에 스러진지 1년이 되고 유신 공포가 정점에 달했다. 교실 뒤 학급 게시판에는 김종필 총리가 외국을 순방한다는 신문기사가 붙었고 반공 웅변대회와  반공 글짓기대회와 반공 미술대회가 온 나라에 장티푸스처럼 번졌다. 장티푸스는 ‘염병’이다. 고열의 고통 속에 발광하다 죽는다. 그래서 나온 말이 ‘염병 지랄’. (반공과 애국이 염병지랄)

 

1978년 리사이틀을 끝으로 매카시즘의 열풍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김추자는 브라운관에서 점차 사라졌다. 압제와 반전과 히피문화가 동시에 열풍노도처럼 등장할 때 김추자는 중심에서 바람을 몬 목격자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눈물도 거짓말. ... 그렇게도 잊었나 세월 따라 잊었나 웃음 속에 만나고 눈물 속에 헤어져 다시는 사랑 않으리 그대 잊으리” -<거짓말이야> 1971년 발표한 이 노래에서 유신을 거짓말이라고 왜곡한다며 중앙정보부는 김추자를 미행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때문에 이사를 자주 다녀서 간첩이라는 소문은 증폭했다.

 

“꽃잎이 피고 질 때는 그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 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 버렸네. 그대 왜 날 찾지 않고 그대는 왜 가버렸나. 꽃잎 보면 생각하네 왜 그렇게 헤어졌나.....” -<꽃잎>

왜 그렇게 헤어지긴.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다 하고 살겠어. 그러니까 오해 속에 이별이 온거지. 하지만 내가 저 노래를 따라 불렀던 10대 무렵, 남녀간의 정리가 뭔지를 알 턱 없이 울적해서 저녁밥을 안 먹겠다고 고집을 피운 적이 있다.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절절 끓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님은 먼 곳에>를 들을 땐 눈물을 철철 흘렸다. 이마에 피가 막 마를락 말락 하던 풋내기가.

 

1951년생인 김추자는 1981년 동아대 교수와 결혼하고 매스컴에서 자취를 감췄다. 자신의 삶으로 떠난 김추자는 이례적으로 1986년 리사이틀을 열었다. 그러나 가요계 복귀 예상을 뒤엎고 남편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2001년 활동 재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오보였다.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가 나올 만큼 김추자는 1970년대 사람이다. 김추자 외에 김정미가 ‘음색 도발’을 촉발했다면 김추자는 자기가 부르는 모든 노래를 ‘김추자化’ 했다. 도무지 다른 가수가 부르는 김추자 노래는 노래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비록 김추자는 ‘내 최초의 여신’이지만 김추자는 유투브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국가요는 최첨단 디지털 영상 매체와 기획사에서 완벽하게 만들어진 기획 상품 출시처럼 아이돌 가수가 호황중이다. 한때 김추자를 일컬어 1970년대의 이효리라는 경악할 비교가 있었다. 이효리와 김추자는 비교불가이며 비유불가다. 김추자 노래를 제 정신으로 들었다면 나올수 없는 말이다.

 

누군가에게 김추자는 듣보잡이다. 그렇다고 서운하진 않다. 추억은 저마다 가슴 속에 다른 별을 품는다. 그래서 ‘김추자 행성’을 기억하는 나 같은 늙다리는 겨울비 오는 날, 하릴없이 유투브에서 김추자 노래나 틀어놓고 이 따위 글이나 끼적거린다.

 

(사실은 <Joan Baez 자서전> 서평이 안 써져서 쓴 글) 이라고 말하지만 ‘온전한’ 제목을 붙이자면 ‘김추자 오마쥬’ 다.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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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고 2013.01.25 0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추자에 대한 오마쥬 잘 읽었습니다. 그녀의 노래가 이런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있었는지 몰랐습니다.그녀의 노래를 다시 듣고 싶네요.

  2. 김광수 2013.01.25 10: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감, 공감, 만감교차, 생명력이 퍼덕이는 살아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3. 큰바위 2013.01.25 13:1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추자 노래 요즘 즐겨 듣고 있습니다.뭔가 흡인력이 있습니다.재발견이라고 할까나?글도 아주 잘읽엇습니다.김추자만의 독특한 음색과 창법이 매력이 있습니다.

  4. LONGLIFEYOON 2013.01.25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5. 안뜰에봄 2013.01.25 16: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정말 그리운 이름입니다 유럽에 그리운 아바가 있었다면
    한국엔 김추자 입니다 누구도 감히 범접할수없는 묘한 매력의 소유자 이세상에 둘이 될수 없는
    바로 한사람 입니다 김추자... 저도 그립고 또 그립습니다~^^

  6. 소양강 2013.01.26 00: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김추자 팬클럽 회원입니다.
    그런데 김추자님이 오는 4월 6,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컴백 무대를 갖습니다.
    다음의 팬클럽 '김추자 포에버'에 오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성스럽게 써주신 이 글을 팬클럽에 퍼가도 되겠지요?^^

  7. 수리산 2013.01.28 19: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꺼번에 담배와 노래 선물 받았습니다.

    좋은 글 고맙구요.

    갑자기 중학생이 된 기분이라 흐뭇합니다.

    조용하고 편한 저녁 보내시길.

  8. 2013.03.02 0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잘쓰시네요

  9. 성우제 2017.07.28 21: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성욱 검색하다가, 이 글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서, 잘 읽었다는 인사라도 남겨야 될 것 같아서요. 신중현씨와 인터뷰한 적 있는데, 김추자를 물어보니 재미있는 이야기를... 재주꾼이라고 소문난 동국대 여학생을 누가 데리고 와서 노래를 시켜봤더니, 박자감이 조금 떨어지더라는 겁니다. 그래도 끼가 철철 넘쳐서 물건이다 하고 맹훈련시켰다고. 당시 신중현은 펄시스터즈를 히트시켜 최고의 히트 작곡가 반열에 올랐지만 김추자에게는 좀체 기회가 안 오더라는 겁니다. 어느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와서 "패티김 펑크가 났는데 신인 키운다는 말 들었다"고... 거기에 김추자를 밀어넣어, 장안에 큰 충격을 안기고... 그 이후는 위에 적으신 대로...신중현의 특징은 노래 한 곡을 자기 사단의 여러 가수들이 부르게 하는 건데요, 모두들 개성껏 불러내죠. 김추자와 김정미가 압권이라고 보는데, 김추자가 대중적이라면 김정미는 덕후들에게나 사랑받을 정도로 개성을 극단으로 몰고간 느낌이 들고요.
    김추자의 마지막 방송은 1984년 MBC의 무슨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공연에서 찍은 사진이 마지막 정규앨범 표지가 되고요. 이성욱은 당시 세브란스병원 입원중이었는데, 병실에서 어른들이 그걸 못 보게 하자, 병원에서 나와 다방을 찾았다가 꿰멘 데가 터졌다고 하더군요.
    재작년인가, 컴백 공연했었다고 들었는데, 거기 다녀온 친구 말이 안쓰러웠다고... 그래도 누님을 사랑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