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가 몸을 열었습니다. 서울은 벚꽃이 졌다는데 제가 사는 마을은 이제야 꽃 잔치를 시작합니다. 늦어도 봄은 오고 꽃은 핍니다.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인 수선화는 흔히 꽃 화(花)자를 빼고 수선(水仙)이라고 부릅니다. 꽃은 꽃인데 사람에게 붙이는 신선 선(仙)자를 썼기 때문일까요? 꽃에 인격을 부여한 일은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옛사람은 복숭아꽃인 도화(桃花)나 매화(梅花)처럼 어여쁜 여인의 자태를 보고 꽃 같다고 했지요. 당나라 현종의 아내였던 양귀비도 꽃에 비유합니다. 달처럼 둥글둥글 하얀 얼굴을 지닌 여인을 보곤 박꽃처럼 탐스럽다고 표현합니다. 난초처럼 낭창낭창 몸매가 가녀린 여인도 있습니다.


수선화는 나르시시즘을 상징하는 꽃이지만 무리지어 있으면 고아(古雅)합니다. 고아는 옛 고(古)자와 맑고 바른 아(雅)자가 합해졌습니다. 여기서 아(雅)자를 잠시 나눠 볼까요. 牙(어금니 아)+隹(새 추, 높을 최) 결합입니다. 어금니 아()는 무리의 대장을 뜻하기도 해서 전쟁 중 대장 깃발에 써 넣기도 했답니다. 어금니는 음식물을 짓눌러서 분쇄하는 매우 중요한 치아입니다. 어금니가 상하거나 없으면 음식을 먹는데 불편하고 씹는 장애가 발생하므로 소화장애까지 옵니다. 뿐만 아니라 어금니가 없으면 안면형태가 일그러져 보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어금니에 ‘바르다’라는 뜻을 부여한 건 당연합니다. 여기에 ‘높다’는 뜻을 합쳐서 ‘아(雅)’자는 품격 높은 뜻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물(水)의 신선(仙), 수선에게 합당한 칭호입니다. 수선화를 물의 신선이라고 부른 건 흙 뿐만 아니라 물에서도 생육이 가능한 구근식물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는 하늘에 있는 귀한 것을 천선(天仙), 땅에 있는 건 지선(地仙), 물에 있는 건 수선(水仙)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물 속의 신선은 봄이 되어 몸을 열고 지상에 잠깐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꽃이 된 신선들이 앞다퉈 지상에 모이는 봄은 신선 잔칫날이 되는 걸까요. 수선화 한 포기, 꽃 잎 한 장, 도톰한 꽃 술을 살포시 만져봅니다.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저렇게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나는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중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 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 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 가

잔물결마저 눈부시구나

언젠가 이 강가에 나와 하염없던 날이 있었다

흰빛과 분홍빛 붉고 노란 봄날

잔인하구나

누가 나를 부르기는 하는 것이냐

                                                  -박남준. ‘봄날은 갔네’-


아내와 헤어진 한 남자가 쓸쓸한 심정을 달래고자 쌍계사를 찾아갑니다. 그런데 때마침 벚꽃이 만개했고 상춘객들이 북적입니다. 꽃잔치에 몰려든 사람들은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흥에 겨웠습니다. 꽃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저마다 웃고 떠듭니다. 집단 최음제라도 복용한 듯 꽃나무 아래서 즐겁고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자니 더 쓸쓸합니다. 나 빼고는 다들 행복한 것 같아서 투덜거립니다. 그래서 왜 꽃은 피고 지랄이냐고 퉁을 놓습니다. 고요한 회고와 고적한 자조를 곱씹으며 하릴없고자 했거늘 소란스런 인파 때문에 애당초 생각했던 여정이 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피하고자 터덜터덜 섬진강을 찾았습니다. 섬진강은 희고 고운 모래밭이 있는 강입니다. 옛날에 섬진강은 ‘모래가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람’은 ‘강’의 우리말입니다. 모래가람은 모래 강이라는 뜻이지요. 시인은 섬진강에 소주 한 병 들고 갔을까요. 이제 막 물이 올라 연둣빛을 띠는 왕버드나무가 바람에 나풀나풀합니다. 햇빛은 눈부시고 강물은 은빛으로 반짝이며 봄꽃은 춘정 한 점 한 점을 떼어내듯 떨어집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지고 앙졸대는 작은 새 같은 아이들을 품을 수 없는 남자는 봄날이 잔인하다고 말합니다.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 벚꽃나무가 환합니다. 장정 서너 명이 모여 껴안아야 할 정도 큰 나무가 네그루입니다. 봄이면 크리스마스 꼬마전구처럼 환하게 핀 벚꽃은 멀리서 봐도 눈이 부시고 밤에도 새하얗게 빛납니다. 이렇게 무리지어 핀 꽃덩어리를 ‘꽃숭어리’라고 한답니다. 꽃숭어리, 예쁘죠? 꽃, 숭.어.리. 입술을 모아 소리를 내봅니다. 꽃이 막 송글송글 뭉치뭉치 피어나는 느낌입니다.


花の陰あかの他人はなかりけり

꽃그늘 아래선 생판 남인 사람 아무도 없네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868~1944)-


고바야시 잇사는 근대 하이쿠 시인입니다. 잇사의 벚꽃 하이쿠를 한 편 더 볼까요.


夕ざくらけふも昔に成にけり

밤에 핀 벚꽃도 옛날이 되어버렸네


시인은 그토록 어여쁘고 환하게 핀 벚꽃을 보면서 무상함을 떠올립니다. 일본사람들은 벚꽃을 보고 무상하다고 말합니다. 화려함 앞에서 유한성을 절감하지요. 신선이 환생했거나 신선이 만든 꽃이라 해도 영원불멸한 건 없습니다. 눈부셔서 황홀한 벚꽃일지라도 떨어지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두보는 꽃잎 하나가 떨어져도 봄빛이 줄어든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曲江二首

           -두보(杜甫. 712~770)-

一片花飛減却春 [일편화비감각춘]

風飄萬點正愁人 [풍표만점정수인]

且看欲盡花經眼 [차간욕진화경안]

莫厭傷多酒入脣 [막염상다주입순]

江上小堂巢翡翠 [강상소당소비취]

苑邊高塚臥麒麟 [원변고총와기린]

細推物理須行樂 [세추물리수행락]

河用浮名絆此身 [하용부명반차신]


한 조각 꽃잎이 져도 봄빛이 줄어드는데

바람에 수많은 꽃잎이 날리니 참으로 시름에 젖네

떨어지는 꽃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봄 상할 줄 알면서도 입에 술을 넣는다

강 위의 작은 집에는 물총새 깃들고

동산 옆 높은 무덤에는 기린이 누웠다

세상의 이치를 헤아려 보니 즐겁게 놀아야 하거늘

어찌 덧없는 이름으로 이 몸을 묶으랴


朝回日日典春衣 [조회일일전춘의]

每日江頭盡醉歸 [매일강두진취귀]

酒債尋常行處有 [주채심상행처유]

人生七十古來稀 [인생칠십고래희]

穿花挾蝶深深見 [천화협접심심견]

點水淸精款款飛 [점수청정관관비]

傳語風光共流轉 [전어풍광공류전]

暫時相賞莫相違 [잠시상상막상위]


조회에 돌아오면 날마다 봄옷을 저당잡혀

매일 곡강에서 만취하여 돌아온다

몇 푼 안되는 술 빚은 가는 곳마다 있기 마련

인생살이 칠십년은 예부터 드문 일이라네

꽃 사이를 맴도는 호랑나비는 보이다말다 하고

강물 위를 스치는 물잠자리는 유유히 난다

봄 경치여! 우리모두 어울려

잠시나마 서로 어기지 말고 상춘의 기쁨을 나누자









두보가 지은 곡강이수(曲江二首)에 붙인 그림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키요에 화가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의 딸인 카츠시카 오에이(葛飾 応為,1800?-1866?)가 린 것으로 알려진 야앵미인도(夜櫻美人圖)입니다. 밤 앵두나무 아래서 붉은 기모노를 입은 여인은 그림을 그리고 있군요. 어쩌면 그림 위에 시를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앵두꽃이 환하게 피어서 큰등불 대신 작은 기름초를 밝혔습니다. 사방은 어두운데 불빛에 비친 꽃빛은 환합니다. 여인의 발치에는  떨어진 꽃잎이 소복히 쌓였습니다. 천상의 별이 떨어져 지상의 꽃으로 핀걸까요. 꽃잎인지 별빛인지 반딧불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하얀 점들이 어둠 속에서 반짝입니다. 하늘과 땅에 꽃이 가득합니다. 여인이 입은 붉은 옷처럼 그리움은 뜨겁습니다. 제가 매우 좋아하는 그림인데요, 여기에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가 쓴 하이쿠 하나를 그림 속의 여인처럼 꽃몸살을 앓는 당신에게 부치겠습니다. 


しばらくは花の上なる月夜かな

얼마 동안은 꽃 위에 달이 걸린 밤이겠구나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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