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또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허물고 나를 허물었던 숱한 벽들과

되돌아볼 때마다 소금기둥으로 굳어버리던 발자국들

한번도 이 지상에 꽃핀 적 없던 예언의 말씀들 위에

자주 쓰러져 발 묶여 울 때마다 꽃다지처럼

피어오르던 순은의 종소리를

무엇과도 바뀌지 않는 날들의 책갈피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흘러가는 내 이름의

그 오랜 꽃말들을


_류 근, 「내 이름의 꽃말」가운데_



 

덕달미 마을 가는 길은 샛길이 여럿 있다.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은 보건지소 옆을 끼고 도는 길이다. 집에서 10여분 걸으면 보건지소가 나온다. 농협을 지나 서해식당 앞에서 길을 건너면 술집〈원호프〉가 나온다.〈원호프〉는 전에는 커피를 팔았다. 길에서 사람 보는 게 자동차 보는 것보다 적은 한갓진 시골 다방은 늙수그레한 시골 남자들 단골 몇 명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원다방〉은 술집으로 업종을 바꿨다. 면에서 하나뿐인 다방이 하나뿐인 술집이 되었다.〈원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던 남자들은 간판을 바꾼〈원호프〉에서 술을 마셨다. 세상에 있는 듯 없는 듯 자취 없이 사는 시골 늙은 남자들은 들일을 마치고 고단한 육신을 술 몇 잔으로 다독였다. 그렇다고〈원호프〉가 돈을 잘 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커피를 팔 때나 술을 팔 때나 찾아가는 사람은 정해졌다. 


전주인은 가게를 팔고 김공장에 취직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주인에서 직원이 되자 돈을 더 많이 만질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주인이 바뀐〈원호프〉는 그렇다고 벌이가 나아진 것 같진 않다. 고만고만하게 찾아오던 단골들도 몇 년 새 하나 둘 늙어서 노인이 되었거나 되는 중이다. 붉은 장미 세 송이가 담벼락에 꼭 붙어 피고 겨울이면 갈탄난로를 떼는〈원호프〉앞을 지나 보건지소를 돌면 덕달미 가는 길이 보인다.



보건지소 담벼락을 돌면 대야실 마을 끝자락이 얕으막한 산 아래 걸쳐 있다. 오른쪽으로 멀리 덕달미 마을로 이어진 길이 보인다. 시멘트 포장 길은 2년 전에 아스콘을 깔았다. 이 길은 버스, 트럭, 승용차를 비롯해 경운기와 오토바이 등이 다닌다. 덕달미 마을보다 더 먼 거산마을 사람들까지 이 길을 이용한다.〈원호프〉에서 얼콰해진 남자들은 노을 속에 잠기는 저녁 하늘을 보며 이 길로 트럭을 운전해 집에 간다. 집은 그곳이 어디이든 돌아가 몸을 누이는 곳이고 옭죄이고 너덜해진 마음을 풀어 놓는 곳이다. 신발끈을 풀고 허리띠를 풀고 벌거벗은 몸으로 벌거벗은 영혼과 합치되는 곳, 그곳은 길 끝에 있다. 길이 끝나면 집이 나온다. 낮과 밤, 집에서 나와 길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길은 잇는다.



소를 키우는 농장 앞에는 큰 뽕나무가 한 그루 있다. 6월이면 산책길에서 가장 오래 머무는 반가운 장소이다. 논이나 밭둑에 저절로 씨앗이 파고들어 자란 다른 뽕나무와는 다르게 알이 굵고 단맛이 강하다. 뽕나무는 시골에서 흔하다. 아무도 가던 길 멈추고 열매를 따먹지 않는다. 외려 귀찮다고 벤다. 걸음을 멈추고 뽕나무에 매달려 손과 입에 검붉은 물이 들도록 실컷 따 먹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난다. ‘은총의 시간’이다. 가지가 잘려나간 뽕나무는 가치를 외면 당하고 천대를 받는 와중에 묵묵하게 인내하고 침묵한다. 스스로 자연이면서 자연에 헌신한다. 이 특별한 ‘지구의 성서’는 6월을 온 몸으로 기록하는 바, 6월에 덕달미 마을 가는 길은 뽕을 따는 길이다. 


     ⊙ 사진 오른쪽이 뽕나무 


누가 쓴 글인지 기억이 안 난다. “당신은 지구에서 무엇을 가장 많이 보았는가?” 시였는지, 소설이었는지, 산문이었는지 잊었다. 프루스트인지, 헤세인지, 키냐르인지 모르겠다. 내가 가장 많이 본 것은 무엇일까. 들판이지 싶다. 시골에서 수 년을 살다보니 이제는 꿈을 꿔도 배경이 시골이다. 내가 떠나 온 도시가 도통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산보다 들이 많은 고장이다보니 어디를 가든 작물부터 눈에 들어온다. 저 집 배추는 어떻고 논에는 피가 많고 쭉정이가 없고 모내기가 늦었고. 반푼어치 농부 평론가처럼 생각이 일어난다. 


그 가운데 가을 들녘은 강렬한 배경이다. 샛노랗고 해맑고 눈부신 황홀한 홤금색이 들판에 넘실댄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늑하고 몸이 따듯하다. 10월이면 아무 곳에도 가고 싶지 않다. 덕달미 마을 가는 길은 얼음조각처럼 박힌 몸과 마음의 한기를 녹이는 길이다. 세상의 모든 위계를 변별할 필요 없고 박제된 절대성을 질문할 필요 없다. 샛노란 들녘 앞에서 자연의 숭고함을 입에 올리는 일조차 비트켄슈타인의 말처럼 “헛도는 말”에 불과하다. 나는 오래도록, 죽음에 이를 때까지 가을 들녘에 몸과 마음을 기꺼이 마취 당하고 하나의 무늬가 되기를 갈망해마지 않는다.



참나무 가지 위에 앉아 밤이나 도토리를 까 먹는 청솔모나 다람쥐가 후두둑 달아나는 걸 보노라면 마침내 덕달미 마을 알림판이 나타난다. 집에서 30분 거리다.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유송리로 불리기 시작했던 게 이제껏 행정명으로 굳어졌다. 유송리(有松里)는 ‘소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덕달미는 고유명이며 순우리말로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라고 한다. 어원을 찾았으나 인터넷에서도 검색이 안 되고 마을 노인들도 모른다고 한다. 아담하고 귀여운 이름, 덕달미는 한창 가을걷이를 하고 있다.


그러나 덕달미는 조용한 마을이 아니다. 서해안 고속도로가 코 앞에 있다. 방음벽이 있지만 100여 미터 떨어진 거리에서조차 자동차 소리가 크게 들린다. 방음벽 길이가 짧고 높이가 낮기 때문이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 덕달미는 인근 들녘을 품에 안은 꽤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마을 뒤로는 소나무가 울창한 동산이 있고 앞으로는 만석지기 들판이 펼쳐 있었단다. 지금 덕달미는 고속도로 때문에 두 쪽으로 나뉘었고 그마저 집이 몇 채 없다. 소음 때문에 이사를 갔거나 노인 혼자 살다 명을 달리했다. 고속도로가 생기고 문전옥답을 일구던 농부들이 사라지고 덕달미는 황금 들녘이 무색하게 밤과 낮이 소음에 찢어지고 부서지고 있다.




떠난 사람들이 타향에서 새 삶을 지탱하는 동안 고향에는 감이 열린다. 아직 온기가 남은 집과 이제는 처마가 주저 앉은 집조차 볕은 골고루 스민다. 스미고 번지는 온도는 같으나 수혜자가 있는 집은 기둥마다 윤기가 흐른다. 길이 사람의 움직임과 생사멸실을 함께하듯 집은 사람과 함께 나고 살다가 스러진다. 사람이 사라진 집을 보면 스산하고 허허롭다. 끝내 잇지 못하고 끊어진 사람의 이야기가 퇴물처럼 뒹굴다가 녹슬어 부서져 내리는 폐허, 덕달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룩한 찬란한 산업주의의 한 페이지를 기억하는 장소이다. 


⊙ 지금은 시골에서조차 보기 힘든 농기구 ‘지게’





마을길, 밭둑, 논둑, 산길마다 쓰레기가 뒹군다. 대개 불에 타지 않거나 썩지 않는 물건이다. 물신을 숭배하면서 물건을 하찮게 여기는 이상한 습성이다. 사람의 품성, 즉 인격은 부모의 가르침과 됨됨이를 이루는 가치관이 주도한다. 훈육과 환경에 지배 당하는 사람에게 한가지 이념을 집중 공략하다보면 다른 이념과 가치와 의미를 잊거나 잃는다. 이 늪에 빠지지 않기란 쉽지 않다. 정치 이념에 지배 당하고 사회 통념에 순종하고 문화 풍토에 맹목한다. 문명의 이름으로 맞닥뜨리거나 닿거나 손에 넣은 것들을 개념없이 사용한다. 좋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무지한 족속이라 후회하고 자만한다. 


얼마간의 사람들이 들길에서 소주를 나눠 마셨다. 빈 소주병을 집에 들고 가 모으거나 농협 빈병 수집에 내는 일이 번거롭다. 때마침 지나가는 자동차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다. 일행만 모른 척 하면 된다. 길 옆에 버렸다. 가을걷이 때 들에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은 스티로폼 짜장면 그릇과 튀긴 닭뼈와 나무 젓가락이 논둑에 뒹군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 비닐 봉지는 들썩이다가 내용물을 왕창 토한다. 비닐 봉지는 바람결 따라 멀리 날아가고 길고양이나 삵, 쥐와 두더지가 썩은 음식을 먹고 게워낸다. 썩지 않는 소주병이나 플라스틱은 먼 훗날 타임캡슐의 유물처럼 발견될까. 썩지 않는 것들은 흉하고 아프다. 하물며 집 쓰레기를 가져와 나무 곁에서 태운다. 불에 몸을 덴 나무가 시골에 많은 이유는 쓰레기 때문이다. 문명의 낮은 머리로 파괴를 서슴치 않는 게 사람이다. 덕달미는 아름답지만 슬프다.



노인이 경운기를 운전해 콩껍질을 분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도리깨질을 했지만 힘에 부친다. 콩을 많이 심는 집은 콩탈곡기를 마련하지만 자급농은 큰돈을 들일 수 없다. 볕에 잘 말린 콩대를 쭉 펼치고 경운기로 살살 몇번 밟고 지나가면 껍질이 부서지면서 콩과 껍질이 분리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만난 노인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자 연시처럼 말간 웃음을 띄고 말한다. “아유, 이런 사진이 뭐라고 찍는대유. 별스럽지 않유.” 시시한 거 뭐하러 찍느냐는 말이다. 


이렇게 골라낸 콩은 메주를 만들거나 밥에 넣어 먹는다. 바람이 찌를 듯 차갑고 마을에 함박눈이 펄펄 내릴 때 볶은 콩을 집어 먹으며 텔레비전 연속극을 본다. 겨울을 살찌우려면 가을은 부지깽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정도로 집안으로 들일 곡식이 많다. 들판이 비어질수록 곳간은 채워지고 우체국 택배차는 도시로 바삐 달려간다. 


돌아가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식이위천(以爲天) 이라고 하셨다.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뜻이다. 먹거리를 하늘처럼 중하게 여기라는 말이다. 위밴드 수술이니 슬림 다이어트니 유행병처럼 번진 세상에서 무위당 선생의 말씀을 읊조리면 진부하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손수 심고 가꾼 먹거리를 밥상에 올려본 사람은 진부함의 그 곡진한 내용을 버리지 않는다. 나에게 뭐라고 그러지 마라. 



다시 보건지소로 돌아 나오는 길, 배추밭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렇게 어여쁘고 황홀한 초록덩어리를 볼 수 있는 것도 10월 즈음이다. 잎은 힘껏 물을 빨고 양껏 빛을 쬔다. 사람이 심었으되 자연의 엄중하고 치밀한 순환이 만들었다. 사람의 몸을 보하므로 실사구시이자 마음을 흔드는 섬세한 미쟝센의 조합이다. 집에서 나가 돌아오기까지 10Km. 덕달미는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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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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