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차도, 나를 사로잡고 나를 헤매게 하며 나를 꿈꾸게 하는 것들의 저 생생하고 혼란스러우며 어처구니없어서 난처하고 그리하여 살아 있는 내 안팎의 신호들과 힘들의 소용돌이가 피워낸 한 꽃이요 전혀 새로운 움직임의 시작이며 따라서 또 하나의 세계의 열림인 시조차도, 저 날것, 저 날 소용돌이와 힘들에 비하면 아직도 덜 싱싱하고 덜 생생한 것이니, 나는 시를 쓰려고 한다기보다는 시라는 것을 태어나게 하는 그 힘들과 신호들의 소용돌이 속에 항상 있고 싶을 따름이며, 만일 내 속에서 시가 움튼다면 그 發芽는 마땅히 예의 그 소용돌이의 고요한 중심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이기를……

-정현종 시집《세상의 나무들》에서 저 날 소용돌이’-




시란 무엇인가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은 “내 안팎의 신호들과 힘들의 소용돌이가 피워낸 한 꽃”이라고 말합니다만 저는 살과 욕망에 깃든 근원적 쾌락까지 시의 뿌리가 뻗어 있는 게 아닌가 합니다. 시인이 아니라서 시인을 부러워하고 질투합니다. 시를 쓰지 못하므로 시를 쓰는 사람을 흠모하고 좌절합니다. 딱딱한 책만 읽으면서 어떻게 시를 쓸수 있겠습니까. 시를 못쓰는 사람은 마지막 가을 끝자락을 하염없이, 부질없이, 눈꺼풀을 조금 내리고 바라봅니다. 


시골살이 11월은 몸은 바쁘고 마음은 선선한 달입니다. 봄부터 여름까지 심고 물을 주고 김을 맨 곡식을 거두는 일이 첫번째이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나뭇잎과 풀잎과 하늘에 마음을 놓는 게 두번째 일입니다. 육체와 정신이 오롯한 달이 11월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11월은 육체를 확인하는 달입니다. 


‘육체’라는 낱말은 시골살이 하는 저에게 매우 가까운 말입니다. 인간 육체를 움직여 일하고 자연 육체를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실체와는 다른 뜻입니다. 온갖 세속의 번들거림과 덩어리진 검질김이 시골에 한가득합니다. 시골은 풍경화 액자에 평면으로 들어앉은 박제가 아니라 꿈틀대고 넘어지고 굽고 파헤치고 죽고 살리며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파토스(pathos)입니다. 당장 한여름 싱그런 초록잎이 무성했던 은행나무 이파리가 샛노란 엽록소로 변화하는 모습은 생명의 정념인 것입니다. 마을에 은행나무 노란잎이 길마다 환합니다. 사진 몇장 더 볼까요.





맨 위 사진은 마을 초등학교 울타리 둘레에 있는 은행나무입니다. 볕이 좋은 날 멀리까지 반짝이며 눈부시게 빛납니다. 오디세우스가 귀향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게 됩니다. 두번째 사진은 초등학교 앞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나무 사진입니다. 아담한 나무이지만 숱많고 오동통한 열여섯살처럼 풍성한 이파리가 귀엽습니다. 키가 닿는다면 한번 쓰다듬어주고 싶은 나무입니다. 


세번째 사진은 마을 외딴길에 서 있는 나무입니다. 어쩌다 경운기나 트럭이 지나갈 뿐 일부러 찾는 이는 없습니다. 반듯한 땅에 뿌리 내리는 대신 경사진 터전을 삼았지만 해마다 잎을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길에 떨어진 은행을 몇알 주워와 함박눈이 펄펄 내릴 때 후라이팬에 살살 볶아 먹습니다. 


맨 아래 사진은 옆마을 옛마을회관 앞 사진입니다. 집에서 30여분 거리입니다.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낡은 건물을 밝히는 나무입니다. 샛노란 잎을 모두 떨군 이 나무를 보는 순간 ‘홀가분’이 떠올랐습니다. 한때는 찬탄해마지 않던 위상이나 드러남과 자존감까지 버리고 나면 뒤도 안 돌아보게 될까요. 그래서 우리는 문득 떠나는 이를 가리켜 ‘홀연히 갔다’고 말하는건지도 모릅니다.





 

“발에 익은 천변길을 내버려두고 단풍 소리에 이끌려 기차역 너머의 산길을 올랐다. 40여 분, 산의 이마께까지 올랐다가 낙엽에 가린 소로를 반갑게 찾아내고는 그리로 하산했다. 거의 평지에 이르렀을까 싶었는데, 문득 길이 끊기고 검은색 밤송이로 늪을 이룬 건천(乾川)의 좁은 계곡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잠시 난감해하다가 낮은 언덕 하나를 넘는 순간, 사위가 노-오-랗-게 밝아 오는가 했더니 바로 그곳에 우뚝 솟은 작년에 보았던 신(神)들. 아, 은행나무 신들, 그 수많은 신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신들. 나는 손을 모아 경배하고, 철마다 그 천은(天恩)으로 눈을 맑히는 선물에 깊이 감사하였다. -김영민,《봄날은 간다》에서 ‘은행나무 신(神)’


랭보와 같은 시대 활동했던 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는 시에 대해 질문이 많았던 화가 에드가 드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보게, 시란 말일세. 그건 말로 쓰는 거지 생각으로 쓰는 게 아니라네.”


단풍(丹楓)은 ‘붉은 단풍나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붉다’는 뜻이 두번 들어갑니다. 단풍(丹楓)에서 이미 ‘붉을 단(丹)’을 썼음에도 꼭 ‘붉은 단풍나무’라고 말하게 됩니다. 어법에 맞으려면 단풍나무는 그냥 ‘붉게 물든 나무’나 또는 ‘단풍나무’라고만 써야 합니다. 얼마나 붉으면 ‘붉다’는 말을 두번이나 거듭하게 되는 걸까요. 그냥 붉다고 한번만 말하는 것으로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입니다. 집 마당에 붉게 물든 단풍나무 아래 살포시 들어가 앉아 보았습니다. 가슴 가득 밀물처럼 차오르는 감흥이 일지만 시를 짓지는 못하겠습니다. 생각이 너무 많은 까닭이거나 기교를 염두에 뒀을지 모릅니다. 시인 말라르메 말처럼 당장 느낀 맛으로 쓰는 게 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해당화는 여름꽃입니다. 진분홍꽃을 피웁니다. 장미보다 향기가 진합니다. 꽃이 다 지도록 꿀벌을 맞는 해당화는 이즈음 찬찬이 잎이 집니다. 태양을 좋아하는 꽃이다보니 잎도 선명하게 자태를 드러내며 물듭니다. 초록에서 붉은 기운이 스며들면서 연두색으로 변하고 노랗게 변하다가 짙은 갈색이 되어 떨어집니다. 화려한 꽃을 떠받치던 잎이었으므로 사그라짐도 변화무쌍합니다. 해당화 잎이 물들기 시작하면 울타리 둘레가 알록달록해집니다. 11월에만 보는 풍경입니다.


봄부터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과 중국 정치인이 만나고 일본에서는 헌법 9조 개정 운동이 우익 주도하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영덕에서는 핵발전소 건립문제로 주민끼리 대치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비행기가 떨어져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60여 년 전횡한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는 중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많은 우려를 외면한 채 시행될 것 같습니다. 광화문 광장에는 세월호 참사에 희생되어 수능을 못본 안산 단원고 학생 250명 가방이 놓여졌습니다. 이런저런 소식이 전파를 타고 전해오는 동안 나무는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마침내 순환의 계절에 들어섰습니다. 


그래요. 어떤 일들은 피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반가사유상 얼굴을 한다고 해도 속내는 찢어진 우산이 되기도 합니다. 시인의 말처럼 소용돌이 한가운데 고요의 중심을 볼 수 있다면 붉-거나 샛-노-랗-거나 알-록-달-록한 나뭇잎에 잠시 누추한 정신을 한갓지게 풀어놓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여자도 여러명 낚고 시도 여러편 낚고 세상에 널리 자기 정신을 퍼뜨렸습니다. 가을 늦저녁 11월에 몇몇 인간을 그리워하며 편지를 부칩니다. 아참, 파블로 네루다 본명은 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 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읽으면 네프탈리 리카르도 레예스 바소알토’입니다.     




                                                                                                                     ※ 참고도서















▶ 《봄날은 간다》김영민 지음/글항아리/2012.4

▶《세상의 나무들》정현종 지음/문학과지성사/1995.9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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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샬라쿰 2015.11.14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루다 본명이 참 어렵네요. ㅎㅎㅎ 라틴쪽 이름은 외우기 힘든것 같아요. 사진을 보다가 아직 은행나무 잎이 다 떨어지지 않았나싶어 주위를 돌아봤습니다. 글이 차분하니 편안합니다. 알라딘에서 눈팅만하던 독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