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덜란드 Loosdrechtse PIas 호숫가에 있는 한 칸짜리 집.


2011년 로테르담 건축회사 2by4 설계. 침실, 부엌, 화장실, 샤워시설과 창고까지 갖췄다. 호수 조망을 위해 양쪽 벽은 유리창을 달았고 한쪽벽은 날씨에 따라 개폐가 가능하도록 덧창을 달았다. (출처) 하이프비스트(Hypebeast) 2014년 11월 24일 소개





“1845년의 3월 말경, 나는 도끼 한 자루를 빌려들고 월든 호숫가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호수 가까이에 집 한 채를 지을 생각으로 곧게 뻗은 한창때의 백송나무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월든》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콩코드주 호숫가 마을 ‘월든’에서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 살았다. 소로우에게 집은 잠을 자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였다. 많은 시간을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산책을 하며 보냈다. 문 앞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기도 했다. 겨울밤에는 추워서 머리까지 담요를 뒤집어썼다. 여름에는 숲속에서 나는 온갖 새소리를 듣고 동물을 만났다. 오두막은 좁아서 손님이 한꺼번에 찾아오면 집둘레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나 오두막이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계문명 의존도가 높은 오늘날 소로우처럼 자연 재료로 지은 오두막에서 사는 사람은 흔치 않다. ‘오두막’이라는 말도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집을 가리키는 호칭도 바뀌었다. 시골에서는 ‘농가주택’이나 ‘전원주택’으로 불리고 도시에서는 ‘아파트’가 집의 대명사가 되었다. 문화가 바뀌고 삶이 변하자 집도 달라졌다. 


주거의 변천사를 시대별로 꼼꼼하게 정리한《집-집의 공간과 풍경은 어떻게 달라져 왔을까》전남일 지음. 돌베개. 2015.12.31 에서 저자는 “집의 역사가 곧 우리의 삶의 모습을 말해준다”고 말한다. 결론부터 말해서 주거 공간 변화와 삶은 되먹임 관계로 상호 조응한다.

 

예전에는 집과 땅은 함께 세워졌다. 길지를 택해 집을 짓거나 샀다. 경제 여유가 없으면 움막이라도 지었다. 이런 경우에도 집터를 중요하게 여겼다. 집을 고를 때 땅을 살피는 것처럼 땅은 집의 기본 조건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공동체를 형성했던 근대 이전에는 땅이 마을이나 지역사회와 동의어였다고 한다. 


서양문명이 항구에 도착해 나팔을 불기 이전 한국의 집은 안방과 사랑방, 행랑채, 별당과 같은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양반집은 대문 안에 건물 여러 채를 거느린 복잡한 구조였고 양민은 좀 더 단순했다. 하층계급으로 갈수록 집은 더 작고 불리는 이름도 간단했다. 마침내 서양 사상과 문화가 유입되면서 일상이 달라지고 집도 변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서양과 일본 영향을 동시에 받은 일제강점기 무렵 집이 가장 크게 변했다고 한다. 대문과 마당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대청부터 개조했다. 대청은 ‘큰 마루’라는 뜻을 가졌는데 집 규모에 따라 크기가 비례했다. 집이 큰집은 대청도 컸다. 집안일을 할 때 작업공간으로 사용했던 대청은 평소에는 방을 드나들 때 거치는 공간이었다. 책에 따르면 크기에 반해 역할이 크지 않던 대청은 유리문을 달면서 외부와 차단하는 공간으로 변한다. 한 개의 별도 공간이 된 대청은 집 주인의 사생활 공간이 된 것이다. 공동 작업 공간에서 좀더 내밀한 사적 영역이 된 것이다.

 

대청이 ‘마루’로 이름이 바뀐 건 훨씬 나중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마루’라는 이름은 1970년대부터 등장한 ‘거실’ 이전 사용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마루’는 ‘대청’과 ‘거실’ 사이에 탄생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대청은 난방이 안 되는 구조였으므로 따로 난로를 설치하는 집도 있었고 유리문에 커튼을 달기도 했다. 그러나 대청이 열린 공간 의미가 강한 반면 유리문을 달고 외부와 차단한 대청은 더 이상 대청이라고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애매하고 모호한 상태에 나온 이름이 ‘마루’ 아닐까.

 

“근대적 주거 공간이 도입되었어도 마루라는 용어는 바닥 재료 및 구조를 표현했고 그곳에서의 정해진 기능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오히려 마루의 다양한 기능을 암시한다. 즉, 마루라는 용어는 대청에서 거실로 변화하는 과도기에 다양한 기능의 혼돈을 적당히 표현하는데 적합한 명칭이었다. 그렇지만 실체적인 공간의 성격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바닥 재료를 나무로 쓴 대청처럼 마루도 나무가 대세였지만 간혹 시멘트나 벽돌로 마루를 만든 집도 있었다. 바닥에 카펫을 깔거나 돗자리를 깔아 맨바닥의 이질감을 극복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엎드려 숙제를 하거나 뒹굴던 마루에는 아직 소파가 놓이지 않은 널찍한 자리가 있는 마루였다.

 

책에 따르면 거실이라는 이름이 나온 시기는 1970년대 이후이다. 저자는 “마루가 오직 바닥의 특성만을 지칭한 것이라면, 거실이라는 용어는 장소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대청이나 마루가 잠시 사용하는 기능을 부여받은 반면 거실은 이름에서도 기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머무를 거, 앉을 거(居)’를 사용하는 거실(居室)은 이미 하나의 방이 된 것이다. 거실은 잠을 자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휴식을 취하거나 가족 공동 공간이나 손님을 맞이하면서 교류 공간이 되었다. 


여자 전용 공간이었던 안방 가까이 거실이 등장한 배경에는 남자 전용 공간이었던 사랑방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부부가 안방을 공동 사용하게 된 데 있을 것이다. 남녀평등 사상이 집 구조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안방에 있던 부부가 손님을 쉽게 맞이할 수 있고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 변한 대청은 당당히 ‘방(室)’으로 변모해 거실로 불렸다.

 

대청이 변한 과정에서 보듯 전통가옥은 일제강점기를 기점으로 극변한다. 나무와 흙으로 지은 집을 허물고 벽돌과 시멘트와 유리와 철이 건축 재료가 된 것이다. 건축 재료가 변하고 구조가 변하게 된 기저에는 문화 변화가 크게 작용한다.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 합리성을 기치로 삼아 주거변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직업 변화까지 집 구조와 기능을 개조했다. 책에 따르면 봉건시대 남자 전용 공간이었던 사랑방은 직업 변화에 따라 도태된다. 거주지 반경 내에서 일을 하던 봉건시대와 달리 근대에 들어 거주지와 떨어진 곳으로 출퇴근하는 직업이 생긴 것이다. 하루 종일 집을 비운 남자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가족의 위로를 기대했다.

 

이전까지 여자 전용 공간이었던 안방에 모여 아내와 자식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마침내 안방은 가족 구성원과 함께 누릴 보금자리 기능을 부여받는다. 이 책에서 재미있게 읽은 안방 풍경은 내가 경험한 1970년대를 추억할 수 있었다. 안방은 밤에는 부부가 잠을 자고 낮에는 손님을 맞이했다. 텔레비전을 보고 밥을 먹는 가족 공동 공간이 안방이었다. 안살림을 맡은 사람은 안방에 그럴듯한 가구를 들여 손님에게 과시했다. 안방 가구는 그 집안 경제력을 보여줬다.

 

1980년대 이후 안방은 부부침실로 바뀌고 손님을 맞이하거나 집안 행사는 거실에서 맡게 된다. 흥미로운 건 아직 거실이 등장하기 전에 ‘응접실’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응접실은 손님 전용 공간으로 사랑방 구실을 했다. 대개 마루 옆에 곁방을 따로 마련해 만든 응접실에는 소파와 탁자를 놓았다. 그림이나 조각품으로 치장했다. 안방이 여자의 취향을 반영했다면 응접실은 남자의 취향을 적용한 공간이었다. 응접실 또한 밖에서 일을 처리하는 세태에 밀려 사라지고 집은 좀 더 개인 공간으로 변한다.

 

마침내 거실마저 가족 공동 공간 기능을 잃고 있다고 저자는 가리킨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구성원이 축소되고 개인 공간이 활성화된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컴퓨터를 비롯한 최신 설비를 손쉽게 갖춘 자기 방에서 혼자만의 취미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저자는 이 현상을 가리켜 “공간의 위계질서가 사라지고 동등한 방들로 구성된 건축구조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 영역 구분이 더욱 견고해졌다.”고 한다. 말하자면 개인 공간이 안락해질수록 공동공간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지적이다.



▲ 전통가옥에 유리문을 단 최순우 옛집


한국전쟁 이후 화장실과 부엌이 집안으로 들어오면서 집은 더 깨끗하고 편리해졌다. 1970년대 이후 아파트 대량 보급은 더욱 많은 생활 편의를 제공했다. 박정희 정권은 토건산업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 산업근대화라는 명분으로 땅과 집을 담보로 삼아 아파트를 지었고 건설사는 경제성장을 주도했다. 부동산이라는 용어가 확장되고 집이 재산증식의 기표가 된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철학이 부재한 경제 성장은 ‘성장 강박증’이라는 질병을 만들었다. 1970년대부터 시작한 부동산 열풍은 경제 지표와 굳건한 가치관으로 고착화했다. 재산증식을 보증할 금융상품이 대안으로 제 몫을 맡지 못한 상태에서 잉여의 돈은 부동산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부동산 파동에서 결국 자본이 우세한 자에 의해 집의 점유율이 독점되는 건 예견된 일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는 광고처럼 집없는 서러움부터 부동산 재벌까지 적어도 한국에서 집은 보금자리를 넘은 부의 상징이자 신분의 증표가 된 것 같다.

 

“아파트에 살면서 나는 아파트가 하나의 거주 공간이 아니라 사고 양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중산층의 사고 양식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술꾼에는 술을 마시면 취하는 버릇이 있듯이 여러 가지의 병이 있다. 그 가장 큰 병은 새로운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어 하는 병이다. 사람들이란 혼자 있을 때는 제법 사람 같은 생각을 하다가도 여럿이 있을 때는 금새 달라진다. 남 앞에서는 가능하면 은밀하게……왜냐하면 아파트 주민들은 문화인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속성이다. 그래서 가장 우선하는 것은 같은 동네, 또는 같은 층에 사는 사람이 자기보다 우월한지 우월하지 않은지를 탐색하는 것이다.”-김현, 「알고 보니 아파트는 살 데가 아니더라」에서.

 

집은 사회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다. 개인의 삶부터 사회현상과 부동산 정책, 문화와 같은 다양한 요소가 결합했다. 내 집 마련 자구책으로 땅콩주택, 타운하우스와 같은 경제성을 고려한 집을 짓는다. 전원주택, 농가주택이 농촌을 상징한다면 펜트하우스와 고시원은 사회 양극화를 증언한다. 마당 중심에서 거실 중심으로, 마을과 지역 단위에서 개인 공간 단위로, 보금자리에서 재화와 상품으로 집이 변하는 동안 삶도 변했다. 이 책은 우리가 살았고, 살고 있으며, 살게 될 집이 단순히 시멘트와 철과 화학재료 덩어리가 아님을 지멸있게 톺았다.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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