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신과 전문의 미하엘 빈터호프 Michael Winterhoff 는《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송소민 옮김. 추수밭(청림출판), 2016.5 에서 현대인은 “과도한 요구”를 받고 있다고 진단한다. 선사시대 씨족사회가 아닌 한 온통 신경 써야 할 일이 널려있다. 집과 학교는 규율을 요구하고 사회로 진출할 때는 스펙을 요구 받으며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서는 상대방을 의식해야 한다. 심지어 휴대폰 기계 종류와 요금제 선택마저 쉽지 않다. 선택 조건이 클수록 결정은 어렵다. 보험은 더 심하다. 약관과 종류와 혜택사항을 듣다보면 복잡해서 무엇을 결정해야 하는지 포기하고 싶기까지 하다.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원제는 ‘Mythos Überforderung’로 ‘과도한 요구 신화’를 뜻한다. 사회 병리 현상을 독일 사례에 비추어 정리했지만 불안과 무기력, 우울증과 혐오에 시달리는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자영업자의 불규칙한 생활과 가족의 불안, 일의 목적을 상실해 집단 피해를 고려하지 않은 채 대충 일처리를 하는 직장인, 이미지에 집착한 외모지상주의 허실(虛失), 공감을 잃고 자폐증을 앓는 폐쇄적 분위기, 좌절과 실패를 혐오로 분출하는 광기, 무책임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 등은 오늘 우리가 겪는 병폐이다. 미리 밝히자면 저자가 내린 성숙한 사람이란 ‘자기 결정에 따른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척 놀랜드’[각주:1]처럼 살지 않는 이상 아무것에도 요구 받지 않는 삶이란 게 있을까. 남들처럼 살려면 새 기술과 새 문화에 적응해야 하고 스펙까지 쌓아야 한다. 더 큰 성공을 향해 분투해야 하는 끝없는 분주함을 요구 받다보니 사는 게 피로하다. 저자는 이처럼 ‘과도한 요구’에 노출되다보니 신경쇠약이나 심신피로감에 시달리고 수면장애나 무기력증, 나아가 갈등 폭발, 우울증과 같은 질병에 노출된다고 지적한다. 일이 잘 안 풀리고 힘들고 의미를 잃으면 능률이 떨어진다. 무기력으로 인한 방조와 무책임에 길들여진 사회에서 건강한 담론과 합리적 결정이 사라진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 “과도한 요구”에 시달리는 사회, 누가 우리 등을 떠미는가.

“멀티태스킹, 상시 연락 가능한 상태, 끝없는 분주함, 한 가지 임무에 충실할 수 없는 상황⇒번 아웃(burn out)”. 저자는 이처럼 피로한 상황 반복을 계속 요구하는 문제가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물론 어떤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스스로 채찍질한다. 좋게 말하면 노력이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게 아니라면 그 결과는 성공이든 실패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성공신화를 끝없이 주입하는 사회 분위기나 체제를 지적하지 않는다. 본인 의사에 반한 노력 강요가 있다. 안 그래도 요즈음 ‘노오력’과 ‘열정페이’가 부정적 뉘앙스로 사용된다. 이른 바 갑질에 대한 비유이다. 노동 대가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 착취 때문에 생긴 말이지만 자발적 노력과 강요된 노력은 구분해야 한다. 개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어떤 일이 구조적 문제인지 개인 문제인지 살펴볼 일이다. 직업과 연봉과 사회적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말이다.

 

저자가 “맹목적 행동주의”로 지적한 루프트한자 조종사 파업만 봐도 그렇다. 저자는 조종사 파업으로 항공사와 국가에 큰 손실을 입혔다고 주장한다. 조종사 파업은 여객운송, 화물운송, 물류마비 등 산업 근간을 흔드는 피해가 생긴다. 파업 조종사들은 피해 예상을 모를 리 없다. 해고 조종사 복직과 임금인상, 복지 혜택을 요구했다. 오랫동안 사측과 대립했던 문제다. 저자는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차분하게 마련하지 않고 상대방 비난과 억지로 굴복시키려는 노조 행동은 주목받고자 하는 심리가 작동한 때문이다.” 이라고 한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니다. 노조가 파업을 할 때는 공론화시켜 이목을 집중시켜서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한다.

 

파업 원인과 과정을 좀 더 세밀하게 알 수 없으므로 나로서는 저자 의견에 동의하기 어렵다. 노조가 사리분별 못하고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사리사욕을 챙길 목적이라면, 집단이기주의는 개인이기주의의 집합체라는 설득이 따라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가 산업을 책임지는 조종사들에게 특별한 사명감과 일방적 희생을 요구한다면 조종사 개인의 행복과 충돌한다.

 

사회 구조적 문제와 개인 문제는 같은 궤도에 흐르는 자장 같은 것이다. 그것은 서로 벗어날 수 없다.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집합체이자 독립된 개체이다. 책에 나온 영업직 자영업자 가장 사례처럼 사회 문제와 개인의 삶을 배경으로 문제를 돌아볼 수 있다. 저자는 아이가 잠을 안자고 많이 우는 원인을 일감을 집에까지 갖고 오며 출·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은 가장의 불규칙한 생활 패턴에 있다고 본다. 가장 일정에 맞춘 가족생활이 좀 더 자유로운 시간을 갖지 못하거나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짚지 않은 게 있다. 가장이 집에서까지 고객과 통화하며 영업처리를 하는 상황이란 뻔하다. 영세 사업체인 까닭에 사무실에서 파트타임으로 대신 일을 처리하는 직원이 없거나 위탁할 경제 여유가 없다. 주택 대출금이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아직 어린 아이 장래를 위해 돈을 모아야 한다. 물론 당장 아이 불안 해소가 시급하다. 아이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직업을 바꾸거나 사무실에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할 수도 있다. 간단한 해결책 같지만 사는 게 사지선다형 시험문제는 아니다. 아이에게 불안한 정서를 만드는 가장의 불규칙한 생활 이면에는 무엇으로부터 심한 요구를 받고 있는지 봐야 한다. 일벌레가 아닌 이상 누군들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나.

 

▼ 이미지에 집착하는 사회

지자체 신청사를 지을 때마다 호화청사 때문에 말이 많다. 호화청사 논란 공통점은 무리한 신축으로 인한 세금 낭비 말고도 이상한 디자인을 꼽을 수 있다. UFO 건축 설계 공모전이라도 여는지 둘레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신청사를 심심치 않게 본다. 공공기관 외형까지 이미지 경쟁에 나서지 않고서야 기이한 형태의 건물을 어떻게 이해할까.

 

그렇다면 공적 시설물에까지 왜 이미지 집착을 하게 된 것일까. 저자는 예전에는 ‘관계’를 중요하게 여겨 상대방을 의식했다면 글로벌 경제 시스템이 정착된 1980년대 이후 사람들은 ‘나의 욕구 만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한다. 시민과 국가,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선생과 학생, 공무원과 민원 등 관계를 의식한 사회 분위기가 돈과 이미지에 밀려 퇴색한 것이다. 관계 형성 대신 일방적 관심을 받고 싶은 욕망이 성공 요소로 자리를 차지했다고 봐야 한다. 튀는 행동, 외모, 외양, 조건이 사실 관계 확인 없이 종종 이슈에 성공하는 경우를 보라.

 

SNS를 보자. 얼짱 각도 사진을 찍어 자기 얼굴을 스스로 공개한다. 옷, 구두, 자동차, 상류층이 먹음직한 음식 사진이 인터넷을 달군다. 여기에 근육으로 단련되었거나 날씬한 몸매를 드러내면서 외모지상주의를 완성한다. 그런데 성공요소는 흔히 ‘우월적’으로 묘사되는 외모뿐만이 아니다. 포용력 있는 성격, 너그러운 성품, 따듯한 공감 등 인격까지 과대 포장하는데 이르렀다. 이제 웬만하면 속내를 드러냈다가는 부정적 이미지에 덧씌워지기 십상이다.

 

저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 기대에 맞춰 이미지를 맞추는 일은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건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집단과 다른 의견은 호응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배척받기까지 한다. 다수결이 진리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다. 집단 이미지에 자기 의견을 맞추지 않은 소수가 성공하기란 어렵다. 호화청사 설계도를 보고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은 세태를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나르키소스(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작품. 1594~1596 제작, 로마국립고대미술관 소장)


집단 나르시시즘은 맹목(盲目)이다.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모든 상상과 사고와 행동에 자신을 중심점으로 설정한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미지 관리가 자기중심주의를 맹신한다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집단 나르시시즘이 심각할수록 사회가 일방통행 되는 건 당연하다. 우리는 아리안 민족 우월성에 취했던 히틀러와 일당들, 반공 체제만이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이라고 맹신했던 박정희 정부, 기업이 번성해야 국민이 잘 살수 있다는 이명박 정부에게 자폐증에 걸린 집단 나르시시즘 병폐를 충분히 겪었다.

 

자기중심적 세계관과 자기 확신에 빠져 타인에 대한 공감이 결여된 박근혜 정부를 지나면서 자기애성 인격 장애가 저절로 떠오른다. 저자는 자기애성 인격 장애 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 에 빠지면 자신에 대한 과장된 평가에 들떠서 자기기만에 흠뻑 도취되고 본인이 대단히 훌륭한 인물인줄로 착각한다고 한다. 본인은 성공한 것처럼 착각하지만 정작 둘레에는 큰 짐이 되고 마침내 집단에 패악을 끼칠 인물인 점을 망실했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관계·책임과 같은 상호 교류를 모른다. 자기세계에 빠져 자신의 이미지만 사랑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대화나 논쟁을 거부하고 대신 관심과 과잉 칭찬을 요구하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독재자와 자아도취 병증이 깊은 나르시시스트에게서 확인하는 바, 그들의 최종 목표는 숭배와 흠모 지위를 얻는 것이다. 그것도 맹목적으로.

 

저자는 개인 나르시시즘이 둘레 사람들과 생활 반경에 피곤함과 좌절을 안기는 반면 사회로 확장되면 무기력, 무비판, 차별과 소외를 낳는데 이 모든 출발점은 이미지 집착에 있다고 한다. 즉 이미지를 최상의 가치로 만든 사회는 나르시시스트를 번성시키는 최적지인 셈이다. 내실과 진실과 사실 대신 외모, 브랜드, 스펙, 인맥, 재력 등 남에게 보여주는 이미지에 고착된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차별과 소외와 혐오와 폭력이 나오지 않을까.

 

▼ 어른이 되는 일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뇌는 신경전달물질인 코르티솔을 분비한다고 한다. 코르티솔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트레스에 반응한다. 공격하거나 달아나거나 모든 일에 의미를 잃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코르티솔이 맡은 중요한 역할은 따로 있다. 대뇌피질 넓은 영역을 차지한 코르티솔은 사람이 생각하는 일을 차단한다고 한다. 저자는 바로 이 특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가 직관을 상실한다고 지적한다.

 

의식과 무의식을 비롯해 경험과 인지를 총반영하는 직관을 잃는 다는 건 본능 의존도가 높다는 것을 뜻한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이성적 판단이나 과학적 사고를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 기분 망친 대상에게 화를 내거나 포기하고 싶을 뿐이다. 본능에 지배당할수록 즉흥적 기분과 충동적 감정에 흔들리게 된다. 일이 생각보다 안 풀어지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핑계대기도 쉽다. 심지어 저 사람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한다. 저 사람 때문에, 그 일 때문에, 때마침 무슨 일이 겹쳐서, 되는 일이 없다. 그동안 대체 나는 무엇을 했던가.

 

나대신 누군가 피곤한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저자가 말한 것처럼 “나 대신 결정 좀 해주세요” 하는 어른아이가 도처에 있다. 피트니스트레이너, 웨딩플래너, 식이조절상담사, 건강관리사, 인생 상담사, 커리어코치, 성생활코치, 취업컨설턴트 등 내 삶을 내가 결정하지 못해 대신 결정해주는 직업이 호황이다. 단순한 고충 토로나 상담을 넘은 ‘인생 설계사’를 만난 것처럼 의지한다. 한국에서도 종교인이나 자기계발서 저자, 사회 유명인이 대중을 상대로 인생 상담을 해 주는 게 성황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의지를 잃어서 남이 내 인생을 결정해주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 이건 자기 결정권을 불신한 타자의존성 체념이다.

 

안 그래도 저자가 체념을 일컬어 “삶이 부여한 요구들에 무의식적 항복”이라고 정리했다. 자기 결정에 따른 책임을 미루고 타인에게 나를 맡기는 일은 개인에게 삶의 무의미를 상징한다. 그런데 개인과 가정의 체념이 사회로 확산되면 어떠할까. 이를테면 기업 직원이 체념에 빠지는 바람에 맡은 업무를 소홀히 해서 회사에 큰 손실을 가져왔다고 치자. 나아가 정부나 단체 등 공적 책임과 의무를 수행하는 곳에서 체념이 만연하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 전체로 퍼진다. 저자는 개인의 체념이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다면 집단 체념은 사회가 퇴행구조로 전락한다고 가리킨다.

 

사회가 무책임한 분위기에 폐색이 짙어지면 범죄가 우후죽순 성장한다. 체념은 무책임과 영원한 동반관계로 범죄를 양산하는 좋은 자양분이다. 신분 서열, 그로 인한 체념이나 분노, 이미지 강세에 밀린 소외, 차별에 둔한 자폐성 나르시시즘은 대개 범죄 원인으로 작동한다. 얼마 전 있었던 강남역 살인 사건, 수락산·사패산 살인 사건 등 숱한 사회 범죄는 조현병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없다. 범죄자를 지배하는 감정인 두려움, 흥분, 불안 심층에 얽힌 복잡한 구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간의 뇌에는 과부하를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한 채 과도한 요구상태에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하고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며 대가가 보장되지 못한다면 체념 아니면 무책임 말고 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저자는 좌절하고 피로한 사람들에게 숲을 산책하거나 종교시설을 찾을 것을 권한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읽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개인의 미성숙함은 그렇게 정리하고 노력하여 성숙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치자. 미성숙한 사회분위기도 개인 각자 노력만으로 성숙을 담보할 수 있을까. 있다면 우리 손에 든 패는 무엇인가. 


요즘은 뉴스를 볼 때마다 세기말적 증세를 보는 것처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아노미 anomie[각주:2] 에 흠뻑 적신 기분이다.

 

 

 

 

  1.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에 서 톰 행크스가 분한 남자 주인공. 미국 물류회사 페덱스 직원이었다가 어느날 항공사고가 나서 남태평양 무인도에 홀로 난파된다. 4년 동안 섬에서 살다가 바다에 떠밀려온 알루미늄 판자를 타고 섬 탈출을 한다. 섬에서 사는 동안 난파물건이었던 배구공에 '윌슨'이라는 이름을 짓고 대화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본문으로]
  2. 사회적 규범의 동요·이완·붕괴 등에 의하여 일어나는 혼돈상태 또는 구성원의 욕구나 행위의 무규제 상태. 어원은 무법·무질서의 상태, 신의(神意)나 법의 무시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노미아(anomi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두산백과- [본문으로]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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