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포스터



“1945년이 되자 정말 악인들한테 승리한 줄 알았어요. 새로운 사회를 세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자유, 정의, 박애. 하지만 아무도 전망을 가지려 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단지 근사한 집과 멋진 차 마련에만 신경 쓰죠. 그놈을 프랑크푸르트 법정 피고석에 앉히면 밤에 잠 못 이룰 사람들이 수두룩할 거요.” 

 

1957년 독일 헤센 주 검찰총장 프리츠 바우어[각주:1]는 나치 정권 부역자 수사가 난관에 봉착하자 헤센 주 주지사를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난 지 12년이 지났지만 나치 부역자 청산은 지지부진했다. 미국과 손을 잡고 경제부흥을 꾀한 아데나워[각주:2] 정권은 화해를 주창하며 부역자 척결에 미진했다. 나치 척결에 대한 아데나워의 느슨한 사고는 나치 친위대 정보요원 출신 한스 글롭케[각주:3]를 비서실장에 임명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나치당은 해체되었지만 나치와 긴밀한 관계였던 인물들은 여전히 경찰국장이나 연방정부 검사 등 요직에 있었다. 따라서 추악한 과거를 덮고 현재 권력을 놓고 싶지 않은 부역자들은 부역자 척결 수사에 적극적인 바우어를 감시하고 제거 음모를 꾸민다.

 

오랫동안 추적했던 나치 ‘최종해결’ 책임자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각주:4]을 독일 법정에 세우기 어렵게 되자 바우어는 이스라엘 모사드[각주:5]에게 체포해 줄 것을 요청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리카르도 클레멘트라고 하는 가명으로 메르세데스 벤츠 공장을 다니고 있던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모사드에게 체포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독일 영화〈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Der Staat gegen Fritz Bauer, 2015)는 아이히만이 체포되기까지 과정을 군더더기 없이 만들었다. 독일 경찰국과 사법부의 온갖 방해 공작에 좌절한 바우어가 적국 이스라엘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까지 아이히만을 체포한 이유를 영화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히만을 과거와 마주하게 할 수 있게 할 때, 비로소 독일은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모사드가 아이히만을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데려가고 바우어가 공식 송환을 요청하면 독일로 아이히만을 보내겠다고 협의한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서독을 동시에 주무르고 있던 미국은 친미정권 아데나워를 지켜줘야 했다. 만에 하나 아이히만이 독일 법정에서 나치 부역자 이름을 자백한다면 부역자로 채워진 아데나워 정권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일이었다.

 

때마침 아랍을 견제하는 힘이 필요했던 이스라엘은 많은 무기가 필요했다. 미국은 재빨리 중재에 나섰다. 결과는 바우어 뜻과 정반대였다. 독일은 이스라엘에 무기를 팔고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아이히만을 독일로 보내지 않는다. 과거 적국이었던 독일과 이스라엘은 정치 거래로 밀약했다. 물론 이 거래는 양다리를 걸친 미국이 결정적 역할을 맡았고 독일의 과거와 대면하는 일로부터 멀어졌다. 피해자를 위한 진실규명에 가장 반대하는 집단은 정부라는 사실을 인증한 셈이다.

 

아이히만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모사드에게 체포되기 전에 우파 잡지 ‘〈길〉(Der Weg)’과 회고록을 겸한 비공개 인터뷰를 한다. 유대인 관련 문제가 어떻게 결론 날 것 같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1천 3십만 유대인 전부를 죽였다면 저는 만족하면서 이랬겠죠. “좋다, 적을 모두 제거했다.” 우리의 피, 우리 인민, 인민의 자유를 위한 사명을 완수했을 겁니다. 제가 애초 기획한 적 섬멸 계획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 저한테도 있습니다. 저한테 부족함이 있었고, 책임이 있습니다. 정말 더 많이 할 수 있었을 텐데요, 해야만 했었어요.”

 

지난 22일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 출석한 청와대 전 민정수석 우병우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청문회가 끝나갈 즈음 지금과 같은 대통령 탄핵 소추 소감을 묻자 “그때 좀 더 세밀하게 일처리를 하지 못해 미흡하다고 여깁니다.”고 답변한다. 설마 우병우 전 수석이 “미흡하다”고 여긴 말뜻에 아이히만이 말한 “적 섬멸 계획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한” 심정이 겹쳤다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청문회에서 끝까지 ‘국감 쌩깜’ 태도를 보면, 진실규명에 앞장 선 바우어와 대척점에 있었던 정치검사가 아닌지 의문이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 하야 성명


〈집념의 검사 프리츠 바우어〉를 보면 해방 이후 우리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일제 부역자 청산이 떠오른다. 제헌국회는 1948년 8월 헌법 제101조에 의거해 ‘반민족행위처벌법’[각주:6]을 만들었다. 이 법은, 국권피탈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거나 제국의회의원이 된 자, 독립운동가 및 그 가족을 살상·박해한 자는 최고 무기징역 최하 5년 이상의 징역, 직·간접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재산몰수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미군정은 반민처벌법이 미군정과 동맹 관계였던 친일 경찰과 정치인을 조준한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부했다. 이들을 당장 숙청한다면 인재난에 허덕이고 정부가 무기력에 빠지며 국가가 위험에 처한다는 명분이었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친일 경찰 출신 최난수, 홍택희, 노덕술을 이용해 반민특위 위원을 제거하는 음모를 짰고 심지어 1949년 2월에는 반민법 법률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반민처벌법을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이 법안은 부결되었지만 이승만은 국회 프락치 사건[각주:7]을 일으켜 사실상 처벌법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진실규명 은폐는 5·16[각주:8], 12·12[각주:9] 군사정변으로 대변되는 권력의 사유화로 이어졌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주축으로 한 군사정변 주역들

 

방송에 출연한 바우어는 패전 이후 독일을 구축하는데 힘썼지만 미래를 위한 에너지와 관심을 어떻게 모아야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 헌법을 자랑할 만하다고요? 제 생각엔 우리 독일인들은 들판과 산을 자랑스러워할 순 없어요. 그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괴테와 쉴러를 자랑스러워할 수도 없어요. 아인슈타인도 그래요. 지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가 직접 만든 것들뿐입니다. 


우리 독일의 분위기는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자식으로서 날마다 하는 일들로부터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법조항을 작성하고, 기사를 쓸 수 있고, 최고의 기본법을 만들 수 있어요. 근데 진짜로 여러분들 한데 필요한건 민주적 사회를 사는 시민들이예요. 어느 개인이 민주주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수사를 위해 11월 30일 박영수 변호사가 특검에 임명됐다. 몇차례 관련 의혹 인물을 공개 소환하거나 압수 수색 하면서 수사 의지를 보이고는 있지만 삼성과 유착한 정경유착 비리를 어디까지 파헤칠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유신헌법을 기초하고 대통령 아홉명을 모시면서 지금까지 건재한 정치검사 김기춘과 리틀 김기춘으로 불리는 우병우를 어떻게 처리할지도 궁금하다. 박영수 특검을 기대하는 많은 이들은 온갖 협박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나치 부역자 척결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프리츠 바우어를 떠올릴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촛불을 들고 엄동설한에 광장에 나가는 이유이다.


 


▼ 각주

  1. Fritz Bauer.(1903.7.16~1968.7.1)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 검사. 1920년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사회당원으로 활동하다가 나치 정권 당시 수용소 수감 중 사회당원 포기 각서를 쓰고 덴마크로 추방 당했다. 종전 후 독일로 돌아와 나치 부역자 척결 수사에 검찰총장으로 임명됨.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많은 부역자 색출에 앞장 섰다. [본문으로]
  2. Konrad Adenauer. (1876~1967). 독일 총리. 독일의 정치가. 기민당(基民黨) 당수. 프라이부르크ㆍ뮌헨ㆍ본 대학에서 공부한 뒤 쾰른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1906년 시청 직원으로 들어가 1917년 41세 때 시장이 되었다. 제1차 대전 뒤에는 프러시아 주 의회 의장으로 활약하였고 나치스 시대에는 히틀러에게 반대하여 두 번이나 감옥 생활을 하였다(~1944). 제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69세의 나이에 다시 쾰른 시장으로 일하다 영국군과 의견이 맞지 않아 물러났으며 기독교 민주동맹(CDU)을 조직하여 당수가 되고 제헌 의회 사회 민주당과 싸워 1표 차이로 수상에 당선되었다. 1951년 외상을 겸하고 공산주의 세력을 내쫓는 데 진력했으며 구주 경제 공동체(EEC)를 만들어 경제 부흥을 이룩하였다. 1963년 10월 수상의 자리를 물러날 때까지 수상에 3선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본문으로]
  3. Hans Josef Maria Globke. (1898.9.10~1973.2.13) 독일 출신 관료이자 변호사. 나치 정권 당시 유대인 재산 몰수와 청소를 착안한 뉘른베르크 법안 기초에 참여했다. 종전 후 아데나워 총리 비서실장으로 재직했다. 1963년 사임하면서 독일 연방 최고 훈장인 그랜드 크로스 훈장을 받았다. [본문으로]
  4. 독일 나치당 친위대 중령. (1906.3.19~1962.5.31) 오스트리아 출신 나치 장교로 독일 점령하에 있는 유대인을 색출하고 체포해서 수용소로 보내는 총괄임무를 맡았다. 그가 결재한 '유대인 청소' 작업 인원은 대략 밝혀진 것만 해도 5백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 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가명을 쓰고 살다가 이스라엘 비밀 정보조직 모사드에게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처형됐다. [본문으로]
  5.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 ‘정보 및 특수임무연구소(ha Mossad le Modiin ule Tafkidim Meyuhadim)’가 정식 명칭이다. [본문으로]
  6. 1945년 8월 이전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1948년 9월 제정되었던 법률. [내용] 일제강점기 동안 각 독립운동단체는 일제에 협력한 자의 처벌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나 미국 반대와 이승만 정권의 소극적 태도와 공작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함. [본문으로]
  7.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남조선노동당의 프락치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현역 국회의원 10여 명이 검거되고 기소된 사건.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의 활동을 훼방 놓은 일련의 움직임. 1949년 3월 제헌국회 의원 중 김약수와 같은 진보 정치인들이 외국 군대 철수안, 남북통일 협상안 등을 골자로 한 <평화통일방안 7원칙>을 제시하였다. 남로당 측과 소통한 암호문을 가지고 있던 정제한 의원을 체포하면서 국회 프락치의 충격적 사건은 막을 내린다. [본문으로]
  8.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 소장과 김종필 등 정군파 장교 중심으로 이루어진 군사쿠데타. [본문으로]
  9.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 [본문으로]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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