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먹는 여우/글雜필譚'에 해당되는 글 17건

  1. 2016.11.11 데모하는 사회
  2. 2014.03.28 나는 글을 쓰고 싶어
  3. 2013.06.24 끝나지 않은 전쟁
  4. 2013.05.15 체르노빌,후쿠시마,한국 (1)
  5. 2013.01.21 '킨들'한 책 읽기
  6. 2012.12.30 가산탕진 책덕후의 고백
  7. 2012.12.29 한 마리 개, 짖다
  8. 2012.10.30 고양이를 말해봐
  9. 2012.09.10 책 읽기의 구애
  10. 2012.08.22 성공강박증에 갇힌 자기계발

▲ 1987년 7월 9일 이한열 열사 장례식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낫’, 김남주-



 

‘집회’, ‘시위’‘데모’를 사전에서  찾으면 뜻이 조금씩 다르다.

 

1. 집회(集會, gathering, congregation) :  다수의 사람들이 특정의 목적을 가지고 특정의 장소에 일시적으로 모이는 것

2. 시위(示威, demonstration, protest)위력이나 기세를 떨쳐 보임, 집회나 행진을 하며 위력을 나타내는 일

3. 데모( demo, demonstration) : 반대항의ㆍ시위ㆍ반항의 의사를 집단적으로 가두행진에 의해 나타내는 집단행동을 가리킨다. 통상 깃발이나 현수막을 들고 리듬을 타면서 슬로건을 외치는 집단의 힘을, 특히 공공도로, 공원, 광장이나 정부청사 앞 등에서 실행한다. 때로는 합창이 되고, 때로는 연좌의 항의 행동이 된다


⊙ 가라타니 고진의 〈9·11 원전 반대 시위〉연설문 ⊙

 저는 지난 2011년 4월부터 원전 반대 시위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이 신주쿠 역 앞의 집회에도 6·11 탈원전 데모 때문에 온 적이 있습니다.

 시위에 참가하고 난 뒤부터 데모에 관해 여러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들은 거의 모두가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데모를 해서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이지요.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데모를 힘으로써 사회를 바꾸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데모를 함으로써 일본 사회는 사람들이 ‘데모를 하는 사회’로 바꾸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 중략  ……………………………………………………

 데모는 주권자인 국민의 권리입니다. 데모가 불가능하다면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에서는 20년 전까지 데모가 불가능했습니다. 군사정권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군사정권을 쓰러뜨리고 국민주권을 실현했습니다. 데모로 무너뜨린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데모를 포기할 리가 없습니다.

 그럼 일본에서는 왜 데모가 적은 것일까요? 왜 데모를 이상한 짓이라고 생각할까요? 왜냐하면 국민주권을 자신들의 힘으로 투쟁하여 획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인은 전후에 국민주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패전에 의한 것이었고 사실상 점령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로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받은 또 하나의 질문은 “데모 이외에도 방법이 있지 않은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데모 이외에도 여러 수단이 있습니다. 먼저 선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수단이 있지요.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것은 데모입니다. 데모가 있기 때문에 그 외의 방법들이 유효했던 것입니다. 데모가 없으면 그와 같은 것들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나아가 저는 “이대로 데모가 시들해지지 않겠는가”하는 질문도 받습니다. 전후 일본에서 전국적 규모의 데모가 수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되지 못했고 패배로 끝났습니다. 앞선 질문은 이번의 데모도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라는 의문이지요.

 분명 그런 우려는 있습니다. 대중매체에서는 이미 “후쿠시마 사고는 수습되었다. 지금 당장 경제부흥에 힘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후쿠시마에서는 아무것도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국이나 미디어는 사고가 수습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실을 감추고 그다지 큰 사고는 없었던 것처럼 가장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으니까요.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싶어 합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앞으로 원전 반대 시위가 시들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입니다.

………………………………………………………중략 ……………………………………………………

 그러나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제대로 수습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당장에는 수습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앞으로 피폭자의 병세가 뚜렷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후쿠시마 주민들은 영원히 고향과 이별하게 될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잊으려고 해도, 그리고 실제로 잊었다 해도, 원전 사고와 관련된 일은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첫째, 원전 반대 운동은 오랜 기간 계속될 것이고, 둘째, 그것이 원전에만 그치지 않고 일본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싸워나갑시다.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후쿠시마 원전’을 한국의 ‘세월호 참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입해서 읽어도 내용이나 맥락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집회’를 할 것인지, ‘데모’를 해야 할 것인지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민주권’은 데모에서 나온다는 말을 믿는다면 말이다.


▲1996년 8월 26일 군형법상 반란 수괴 혐의로 법정에 선 전두환·노태우


⊙ 이 사진을 보면서 지금 헌법을 유린하고 국정을 농단한 핵심 인물 두 명을 떠올린다.






※ 참고도서 : 《가능성의 중심》: 인디고 연구소, 가라타니 고진 지음/궁리/2015년 6월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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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글쓰기》(강원국 지음. 메디치미디어. 2014.2)는 대통령의 글쓰기 방법을 소개한 책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연설비서관 출신 저자가 들려주는 비화는 저분저분 재다. 현장에서 땀나게 뛰었다. 대통령 연설문은 청중 다수를 상대하므로 구체적이며 진정성을 갖추고 설득력이 필요하다. 정치, 외교, 비전 등 정책 전분야를 짚어야 한다. 게다가 일반인과는 다른 막중한 검증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저자는 두 가지를 염두에 뒀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뜻을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하는지”, “어떻게 써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저자는 연설문을 예시로 들었지만 좀 더 나은 글을 지향하는 의미에서 글쓰기 방법론과 같다. 글쓰기는 독자와 만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호한 표현이나 현란한 수사는 설득력을 잃고 지루한 글로 전락한다고 저자는 충고한다. 하물며 대통령 연설문은 발언의 진위여부를 가리고 책임을 중시하므로 어떤 글보다 대중성이 필요하다.


저자가 세운 글쓰기 준비물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엇에 관해 쓰지? 둘째, 시작은 어떻게 하지? 셋째, 마무리는 무슨 말로 하지? 이에 대한 답을 가졌다면 글쓰기는 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기둥을 세운 다음엔 뼈대를 만드는 바, 단순하고 명료하며 평범과 압축을 누누이 강조한다. 스타일은 조금 달랐지만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고수하던 방식이다.


설명형 방식을 선호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어려운 내용을 단순화하여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 쏙 들어오게 만드는 데 귀재”였다. 반면에 긴장감 있는 논박을 즐겼던 노무현 대통령은 “담백하고 평범한 단문을 선택했다.”고 한다. 요컨대 쉽고 명확한 표현을 구사했다.


책에 의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반복 설명하며 강조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깔끔한 글을 주문했다고 한다. 빼도 상관없는 부분은 과감히 덜어내고 핵심 메시지를 뽑았다. 간혹 직접 연설문을 작성하고 심지어 연설문 없이 즉석연설을 했다. 단도직입적 성격을 그대로 드러낸 사례다. 상반된 행보였지만 두 대통령은 퇴고에 심혈을 기울였다. 완벽을 기하는 신중함과 꼼꼼한 자기검열은 명문을 낳는다.


알려진 바대로 두 대통령은 다독가다. 김대중 대통령은 서거 직전까지 서너 권의 책을 동시에 읽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마지막 글에서 책을 읽을 수 없어 힘들다고 토로했다. 가장 좋은 글쓰기 교재는 독서임을 새삼 일깨우는 대목이다.


두 대통령은 책 읽는 대통령답게 리더의 글쓰기에 남다른 지론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은 “글은 역사에 남으므로 리더는 자기가 글을 써야 한다.”고 리더관을 피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연설문 애착에 더 적극적이었다. “연설문을 직접 쓰지 못하면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연설문을 토대로 일목요연하게 글쓰기 방법론을 전개한 이 책은 정치성향과는 무관한 친절한 글쓰기 교재다.       


▣ 위 글은 농민신문사 발행 월간지《전원생활》 2014년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글쟁이들 치고 글쓰기 고민을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고 마감이 코 앞에 닥치고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이 겹치면 머릿속은 더 엉킨다. 몸은 베베 꼬이고 신열까지 난다. 이즈음 글쓰기 욕망만 주시고 재능은 주시지 않은 신을 원망하는 일은 무리도 아니다. 어디 글쟁이들만 그런가. 글 쓸 일이 있거나 글쓰기 욕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글쓰기 고충을 경험한다. 요컨대 생각의 실타래가 생각처럼 술술 안 풀리는 것, 그게 글쓰기다. 첫문장을 화면에 띄워놓고 뜬구름 잡듯 막막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때 글쓰기 교본이 눈에 띄면 비상약을 찾은 것처럼 책을 들춘다. 


그렇다고 모든 글쓰기 교본이 명약 처방전이 되는 건 아니다. 위에서 제시한대통령의 글쓰기》는 대통령 연설문을 글쓰기 기준 삼았다. 소설이나 시, 수필, 서평과 같은 골격이 다른 분야는 변형을 해야 한다. 특히 문학 분야는 창작성이 강하므로 딱히 글쓰기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 자기가 쓰고 싶은 문체로 의지대로 밀고 나가는 게 문학이다. 그렇다면 글쓰기 교본은 무용지물인가? 아니다. 



소설가 이승우는《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에서 “소설을 꼼꼼하게 읽고 있는 사람은 이미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소설 쓰기의 기본은 다른 작가가 쓴 소설을 정독하는 것에 있다는 뜻이다. 일종의 염탐이자 관찰이다. 남의 글을 많이 읽으면 글쓰기 욕망을 품는다. 라캉의 말처럼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다가 결국 어느날부터 글쓰기에 집착한 자신을 발견한다. 남이 쓴 글이 나의 글쓰기 욕망에 기름을 부어 준 격이다.


교본은 이래서 필요하다. 막연한 추론 대신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쓰임을 제시한다. 내용 못지 않게 형식이 중요한 이유다. 기본이 탄탄한 형식은 내용을 교통정리해서 글의 품새를 갖추는데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스티븐 킹은《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수동태 문장과 부사를 쓰지 말 것을 경고했다. 수동태 문장은 문장을 죽이는 짓이며 작가가 소심하게 보일 우려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 번 시작한 문장은 가능한 멈추지 말고 죽 이어 달리기 할 것을 요구한다. 맥락이 끊어지지 않기를 경계해야 한다. 소설가인 이승우와 스티븐 킹은 소설 작법에서 이야기 밑그림을 정교하게 그릴 것을 주문한다. 소설은 써 나가는대로 써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치밀한 계산으로 시작할 때 완성도 높은 소설이 나올 것이다.


많은 소설가들은 대개 큰 얼개를 미리 짜 놓고 시작한다. 기획했던 바대로 진행이 안 될 경우 소설은 대개 망하는 바, 단기필마가 연상된다. 꼼꼼하게 긴 시간 공들인 전략대로 달려나가는 소설은 비록 작가 혼자가 여러명의 인물과 대적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주도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는 작가가 작중의 주인공에게 이길 비장의 무기인 설계도가 있기 때문이다.《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쓴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안정효는 쓰려고 하는 소설을 20대 때부터 메모했다고 한다. 영어 논문을 복사하고 작업 구상을 적은 쪽지를 차곡차곡 보관했다. 언제든 요긴하게 사용 할 연장통인 셈이다. 목수가 날 선 대패와 단단한 망치를 준비하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하듯 글쓰기는 자료수집이 첫걸음이다. 수첩에 기록하는 습관도 글쓰기 연장통을 풍성하게 갖추는 비법이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다 관찰대상이며 수집대상이므로 특별하다


그렇다면 큰 설계도를 완성했다고 해서 글쓰기가 숨풍숨풍 쉬워질까. 천만에. 욕망을 가동시켰으나 재능이 없다면 성실함이라도 갖춰야 한다. 안정효는 이것을 ‘꾸준한 뚝심’이라고 한다. 좋은 재능은 축복이지만 계속 쓰는 놈한테는 못 당한다. 그래서 스티븐 킹은 쓰고 또 쓰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인터뷰 잡지인「파리 리뷰」를 창간호부터 모았다. 남의 글 탐독과 자료수집, 두 가지에 해당한다. 그「파리 리뷰」 가운데 서른 여섯명 인터뷰를 수록한《작가란 무엇인가》는 글쓰기 교본은 아니지만 유명작가들의 글쓰기 방법이나 취지 등을 목도할 수 있다.《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한 가브리엘 마르께스는 심지어 여성잡지와 신문 가십난까지 즐겨 읽었다고 한다. 글쓰는 사람에게 있어 소식은 소재를 제공하므로 모든 소식은 중요하다. 일례로, 트루먼 카포티가 켄자스 주 일가족 살인 사건을 신문에서 보고 영감을 얻어《ln Cold Blood》를 쓴 것처럼.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게 있다. 문장을 다듬는 일은 원석을 다듬어 섬세한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것과 같다. 원래 전략대로 글을 진행한다고 해도 문법이 틀어지면 내용이 추락하는 법이다. 물론 타고난 재능과 탁월한 안목으로 소설 작법 따위는 상관없이 뛰어난 감동을 주는 작가도 있다. 헤밍웨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일컬어 “작법은 모르면서 무한한 감동을 주는 작가”라고 말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는 빚에 쫓겨 글을 썼다. 죽기 직전에야 겨우 다 갚았으므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글쓰기란 빚 탕감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글쓰기 교본에서 제일 많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1. 첫문장은 강렬하고 짧게 2. 문장은 짧게 3. 구체적으로.번역문 교본인《번역의 탄생》에선 ~의, ~것, ~적과 같은 표현을 삼가하라고 말한다. 일본식 표현이며 문장이 깔끔하게 안 된다는 요지다. 종결어미가 멀리 던지기처럼 늘어지는 경우도 지루한 문장을 낳는다. 첫문장이 강렬하고 짧으면 이야기 전개에 호기심이 생긴다. 글이 이 세계의 호기심 탐구 영역인 점을 인정한다면, 인상 깊은 첫문장은 독자의 시선을 붙든다. 짧은 문장은 경쾌하고 속도감이 높다. 구체적 묘사는 사실감이 있으며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개입하는 효과가 있다. 


그런데 정말 이대로 써야 좋은 글쓰기일까. 글마다, 분야마다, 작가 취향과 개성마다, 주제마다, 언어마다 글쓰기는 각각 다른 형식과 매력이 있다. 따라서 모든 글쓰기 방식에 통일방식을 적용하는 문제는 다르다. 한자와 영어를 섞어 쓰고 맞춤법에 안 맞는 어법을 구사하는 소설가 박상륭 문체는 이미 ‘한국 문학의 신화’로 자리매김했다. 언어로 된 모든 것을 톺아 쓰는 것도 부족해 작가가 언어창제까지 시도하는 문체는 작가의 고유한 개성이다. 맞춤법의 옳고 틀림과 문장의 정공법을 따질 ‘좋은 글쓰기’로서의 보편성이 아닌 것이다. 글쓰기 표준은 정해질 수가 없다. 다만, 굳이 기본 형식을 언급하는 이유는 독자의 대중화, 즉 친절한 독서를 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만화가 찰스 M 슐츠가 만든 스누피는 타자기로 첫문장을 이렇게 쓰다가 멈추곤 한다. “어둡고 폭풍이 몰아치는 밤이었다.” 글이 안 써져 고뇌하는 스누피는 여자친구 루시에게 평을 부탁하지만 가혹한 소리만 듣는다. 이틀 동안 밤을 새운 스누피는 출판사에서 출판 거절 편지를 산더미처럼 받았다. 좌절이 깊어져 절망 상태에 이르렀을 때 조용히 회고했다.


 “잘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나는 글을 쓰고 싶었어.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주가 끝나갈 즈음에 나는 대학의 학위나 어휘 능력이나 문장을 분석하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제일 중요했던 거야. 루시야, ‘알랑가 모를랑가 모르겠으나’와 같은 멋진 단어를 모른다고 해서, 심지어는 맞춤법을 틀린다고 해서 작가가 될 수 없는 건 아니란다. 문학 학위를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쓰고자 하는 열망을 이길 수는 없는 거야.”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는 글을 쓰고 싶은 주체못할 욕구를 뜻한다. 쓰고 싶어 미치겠는데 써지지 않는 고통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이라도 팔 지경이다. 게다가 왜 그리 많은 비평가와 글 선생님들은 배고픈 상어 떼처럼 덤벼 훈장질을 하는 것인가. 정말 글을 잘 쓰고 싶다. 단 한 번만이라도 만족할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글쓰기 교본을 뒤적이는 사람에게 옛사람, 구양수 선생은 말한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 글쓰기에서는 ‘그 어떤 지름길’도 없음을!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은 이상 대개는 자기가 쓴 글에 대하여 최고의 비평과 편집이 가능하다. 자기 글 맹점을 놓치지 않고 곰곰이 따지며 숙고할 때 글쓰기 욕망은 더 가열차게 타오르리라. 모니터 흰 화면을 마주하고 고뇌하는 밤, 숨을 가다듬는 자판기, 또는 종이의 여백 위를 가로지르는 열정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다.





       ⊙<창조의 진통>-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 作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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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은 정전 60주년이 되는 해다. 전쟁 발발 63년을 맞았지만 아직도 ‘북침설’과 ‘남침설’, ‘남침 유도설’로 설왕설래 중이다. 뿐만 아니라 ‘6.25 사변’과  ‘한국전쟁’, 심지어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으로 불려지기까지 한다. 게다가 중·고등 학생은 이 전쟁의 발발년도를 모르거나 반공 학습을 강제 수혈 받은 세대조차 전쟁의 전개를 잊고 있다. 국사 교과서에서 현대사가 차지한 비중은 10% 미만이며 한국전쟁에 관한 내용은 2쪽 내외다. 따라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을 상기할 때 과거사 왜곡과 은폐, 급봉합은 온전한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전쟁 발발

발생기간 :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3년 1개월 2일)

인명 피해 : 남·북한 150여만 명 사망. 360여만 명 부상

산업 피해 : 발전시설 40%, 공업시설 43%, 철도와 도로 등 사회간접 자본 대부분 파괴.

 

전쟁 주요 일지

1950년_ 

          6월 25일 오전 4시, 전쟁 발발

          6월 27일 대한민국 정부 대전으로 이전/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군대 파견 결의

          6월 28일 북한군, 서울점령

          6월 29일 미국 폭격기 B29 평양 최초 폭격

          6월 30일 북한군, 한강 이남 공격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

          7월 16일 금강 방어선 붕괴. 정부, 대전에서 대구로 옮김

          7월 20일 북한군, 대전 점령

          8월 18일 정부, 부산으로 이전

          8월 21일 한국전쟁 경제지원 일본에 ECA기금 설치

          9월 2일 북한군, 낙동강 일대 총공격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9월 19일 이승만, 상륙작전 축하연에서 국군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할 것으로 발언

          9월 28일 서울 탈환

          9월 29일 정부, 서울로 귀환

         10월19일 유엔군, 평양 점령

         10월 22일 부역 혐의자 9.900명 체포

         10월 25일 중공군 참전

         10월 28일 중부전선 유엔군 후퇴

         10월 30일 트루먼 대통령, 원폭 사용 불사 발언

         12월 3일 신상호 국방장관 유엔측에 원폭 사용 요청

         12월 5일 장진호 전투에서 승리한 북한군 평양 점령(중공군 4만여 명, 유엔군 2.600여 명 사망)

1951년_

          1월 4일 유엔군 서울철수(1.4 후퇴)

          2월 11일 거창 민간인 학살

          2월 19일 중부전선 중공군 철수

          3월 14일 국군, 서울 재탈환

          4월 1일 서울, 피난민 귀환

          4월 11일 기자들과 튀긴 닭요리 먹던 맥아더 사령관, 해임 전달 받음(트루먼의 생방송)

          5월 5일 국회, 정전반대 만장일치 가결(이승만 공작)

          6월 23일 말리크 소련대표, 유엔 총회에서 정전회담 공식 제의

          6월 28일 이승만, 승패없는 정전보다 죽음을 택하겠다고 담화문 발표

          7월 1일 공산군, 정전회담 제안 수락

          7월 10일 첫번 째 정전회담, 의사일정 교환(이후 1953년 7월까지 지속)

          8월 11일 평양방송. 유엔군의 독가스 사용 보도

          8월 25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 정전회담 결렬 시 원폭 사용 언명(해임된 맥아더가 대권후보자로써 영향)

          9월 5일 유엔군, 18일간 동부전선 '피의 능선'에서 전투 점령

          9월 19일 양구 '단장의능선' 전투 격렬

         10월 31일 공산군, 현재의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경계선 제안

         11월 30일 이승만, 양원제와 대통령직선제 중심의 개헌안 제출

         12월 17일 원외 자유당 발기인 대회

         12월 23일 원내 자유당 발기인 대회

1952년_

          1월 10일 정전협정 교착상태

          1월 13일 지리산 빨치산 300여 명 사살

          2월 2일 경상도에 비상계엄 선포(빨치산과 부역 혐의자 소탕 목적)

          2월 5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자유당이 압도적 승리)

          2월 18일 거제 포로수용소 집단 시위

          3월 15일 북경방송, 미국의 세균전 사진 보도

          4월 17일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 포함 민주국민당이 내각책임제 개헌안 제출

          5월 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도드 준장 포로들에게 납치(10일 석방)

          5월 20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집단 시위로 사상자 다수 발생

          5월 24일 한미경제협정 조인('마이어 협정')

          5월 26일 국회의원 50여 명, 국제공산당 자금 수수혐의로 체포(이승만 공작)

          6월 27일 미군, 거제도 포로 수용소 포로 47.000여 명 재심사

          7월 4일 발췌 개헌안 163대 0으로 가결

          7월 10일 국회의장 신익희, 부의장 조봉암, 윤치영 선출

          8월 8일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함태영 선거

          11월 5일 아이젠하워 당선(12월 2일 한국방문)

          12월 15일 봉암도 포로수용소 집단 시위, 82명 사망

1953년_

          1월 5일 이승만 일본 방문

          2월 6일 빨치산 토벌 결과 발표(사살 1.042명. 생포 340명. 귀순 204명)

          3월 5일 스탈린 사망

          3월 9일 밴프린트 미8군 사령관 상원 외교 위원회에서 한국전쟁에 원자탄 사용 주장

          3월 23일 국군 최초 네이팜탄 사용

          4월 11일 이승만, 한국군 단독 북진 선언(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5월 4일 처칠 영국 수상, 송환 불원 포로 중립국으로 인도나 파키스탄 지명에 찬성

          5월 24일 정부, 정전 반대 성명서 발표

          6월 1일 이승만, 정전 성립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하면 정전 반대 철회 제의

          6월 11일 이승만, 정전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성명 발표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유엔은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유엔군의 권한을 침범한 것”으로 성명)

          7월 21일 한국은 정전 협정 조인식에 대표 파견 하지 않겠다고 선언

          7월 27일 미8군 사령관, 9개 국어 방송으로 오후 10시에 정전 명령 발표

                                                   -<군사문제 연구소>,《한국전쟁 일지》참조-

 

 

정전 협정 개요

정전 협정 전개 : ①1951년 7월 8일 연락장교회의 시작~1953년 7월 27일 협정 조인될 때까지 25개월 소요

               ②159차례 본회의와 500여회 넘는 소위원회 개최

정전 : 유엔 정전회담 제159차 본회의에서 정전협정 조인.

협정 장소 : 판문점

조인 대표 :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슨 중장. 북한·중국측 대표 남일 인민군 대장. (남한측 불참)

협정 내용 : ⑴ 전문 5조36항, 부록으로 기술. 영문, 한글, 한문으로 작성.

                ⑵_① 북위 38도 군사분계선과 4km 너비의 비무장지대 설치,

                   ②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 감시위원회 구성

                      ③ 3조 63항의 휴전 조인문에 합의·서명

조인 경과 시간 : 12분

 

 

평화체제 구축 재논의

첫 회담 : 1954년 4월 26일 제네바 정치회의

참석자 : 남(국무총리 변영태), 북(남일), 유엔 참전 16개국 대표

회담 내용_

       남 : 유엔 감시하에 통일 방안 모색

       북 : 외국군(미군) 철수와 한국군 감군 요구

결과 : 87일 간 회담, 결렬. 2007년 10월 4일 남·북 정상 간에 종전선언, 평화협정 논의되었으나 무산.

 

 

전쟁 영향

1. 16개 참전국 150여만 명 외국 병력 참가.

2. 정전 협정 이후 미국은 매카시 선풍이 불어 빨갱이 타도 극심.

3. 미소냉전 심화, 핵무기 경쟁 유발.

4. 미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의 악감정으로 1970년대 핑퐁외교 전까지 적대관계.

5. 2차 대전 패망 후 경제 부흥 기회 얻은 일본군 군사력 재무장 시작.

6. 정전이 체결되었지만 남한은 미국에, 북한은 중국에 군사권 의존.

7. 분단 고착화로 이산가족 고통을 해소하지 못함

8. 남한의 반공 이데올로기 강화. 북한의 핵무기 개발

 

그리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부전선, 동부전선에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도중에도 이승만의 정권장악 시도는 계속되었다. 1950년 피난지 부산에서조차 선거를 염두에 둔 개헌시도. 또한 미국은 맥아더를 위시해서 만주와 시베리아에 이르는 공공연한 원자폭탄 투하를 공언했다. 심지어 맥아더는 트루먼과 불화로 인한 연합군 총사령관 해임 후에도 원폭을 포기하지 않았다. 핵 페기물을 개성에서 원산까지 연결해서 중공군이 남하를 시도 할 경우 폭파하자고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를 찾아가 제안했다. 핵 폐기물을 미국 본토로부터 먼 안전지대에서 처리할 수 있고 중공군을 궤멸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맥아더 동상은 인천 자유공원에 건재한다. 수차례 철거가 거론되었지만 참전군 단체의 반대로 이행을 못하고 있다. 젊어서는 국가를 위해 전쟁에 동원됐던 노병들은 늙어서는 원폭 투하를 고집했던 오만한 오성 장군 맥아더의 수호자인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을 위대한 어버이 수령으로 추앙한다. 정치를 종교화한 남한의 ‘빨갱이 이데올로기’ 역시 1950년 6월 25일이 만든 비극이다. 사회 도처에서 억지 적용되는 종북 이념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래서 1950년 전쟁의 승리자는 과연 누구인가?

 

                                                        ⊙전쟁을 좋아했던 두 사람

 

미국의 극동 아시아 전초기지 한국

1950년 참극은 예견된었다. 중국은 공산 혁명에 성공했고 소련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게다가 1950년 1월 12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산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정한다는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발표한다. 남한은 애치슨 라인에서 배제되면서 김일성을 자극했다. 일본은 2차 대전 패망으로 인한 경제 도약 발판이 필요했다. 그리고 한반도는 남과 북에서 내부적 요동이 거셌다.

 

남한은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을 단행했지만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했다. 정부, 군대, 경찰, 요직을 차지한 친일 부역자들은 여전히 부와 권력을 전횡했다. 민중의 불만에 부응한 진보세력은 자발적 통일의지를 키웠으나 이승만 정권의 반공노선에 억압 당했다. 좌·우익 합작을 시도했던 여운형은 허망하게 죽었고 좌익 세력은 월북을 하거나 몰락했다. 미군정이 점령한 38선 이남에선 좌익은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무력통일을 계획하고 스탈린을 찾아가 협조를 구했다.

 

1949년 6월 15일 작성한 NSC(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자료(일본이 안보상 필요한 데 따른 미국의 전략적 평가)에 의하면 미국은 패권 장악을 위해 일본과 한국을 원했다. 다섯 개의 항목으로 기술된 이 보고서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 열도는 극동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소련의 중요한 공격거점이나 방어거점을 봉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할 경우 소련의 군사행동을 초기에 방어할 수 있다. 아시아 본토와 일본 부근의 소련 열도에 대한 군사 작전을 기획할 수 있다.

 

2. 일본의 전략적 가치는 일본의 인력과 산업의 잠재력으로 점증되고 있다.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은 미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만일 미국이 일본의 통치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일본은 미국의 원조로 아시아에서 소련에 반하는 군사작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4. 군사적 측면을 놓고 볼 때, 극동에서 소련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시아 앞바다의 열도다. 이 열도는 전략적 전진기지 시스템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5. 극동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정책이 일본에서만큼은 저지될 수 있어야 한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전략적인 군사시스템으로서 필요한 열도는 일본 류쿠 열도 장악을 의미한다. 소련과 세계 패권을 다투던 상황에서 미국은 아시아 앞바다에 먼저 깃발을 꽂아야다. 일본에서의 후퇴는 곧 아시아에서 도망치는 일인 것이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이 문서가 작성된 1년 후, 1950년 한반도는 화염에 휩쌓인다.

 

극동 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욕은 2004년 12월 군사요충지인 평택에 닻을 내렸다. 부지 건설 예상비용 10조원은 한국 정부가 부담한다. 참여정부는 병력을 파견해 이주를 반대한 평택 주민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소련 공산당 붕괴 후, 패권을 독점할 줄 알았던 미국은 군사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을 의식했다. 평택은 중국 본토 공략의 전진기지로 낙점됐다. F-15 전투기가 평택에서 이륙해 1시간 만에 상하이와 베이징을 공격하고 돌아올 수 있는 위치다. 미국은 1949년 대아시아 패권기지로 오키나와를 활용했다. 21세기들어 쇠퇴한 오키나와 대신 평택은 미군의 신무기로 채워지고 있다. 

 

정확한 명칭 찾기

사변(事變) [명사]
  • 1.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 없는 천재(天災)나 그 밖의 큰 사건.
  • 2.전쟁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나 경찰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무력을 사용하게 되는 난리.
  • 3.한 나라가 상대국에 선전 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일.
전쟁(戰爭) [명사]
  • 1.국가와 국가, 또는 교전(交戰) 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움.
  • 2.극심한 경쟁이나 혼란 또는 어떤 문제에 대한 아주 적극적인 대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일개 사건으로 치부하는 ‘사변’과 국가적 차원의 대규모 살상이 발생하는 ‘전쟁’의 간극 사이에서 정전 60주년을 맞았다. 보수언론은 한국전쟁을 사변으로 축소해석 한다. 명칭의 불분명한 규정은 이 전쟁의 실체를 가리고 있다.

 

 

 

<참고자료>

《한국전쟁: 박태균 지음. 책과함께. 2005.6.25

《전쟁과 사회: 김동춘 지음. 돌베개. 2000.6.20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박명림 지음. 나남출판. 1996.6.25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옮김. 일월서각. 1986.10.1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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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1986년 4월 26일 발생했다. 올해 27년이 되었지만 체르노빌은 여전히 방사능 수치가 높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즈음 원전에 대한 시선이 생긴 것 같다. 20세기 최대, 최악의 재앙으로 불리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피해 규모는 세계보건기구(WHO) 발표와 국제 NGO 발표, 뉴욕 사이언스 아카데미 발표가 제 각각이다.

 

* 세계보건기구(WHO)

5백만 명의 피폭자 생존. 3백만 명의 어린이 치료. 27만 명 통제구역 거주. 4천 명 사망.

 

*국제 NGO

사망자 : 2만 5천 명~10만 명

암 환자 : 50만 명

 

*뉴욕 사이언스 아카데미

사망자 : 1986년에서 2004년까지 백만 명에 가까움.

 

피폭자나 원전 사고 지역 주민들은 이렇게 통계가 신뢰감있게 정리되지 않은 가운데 27년을 견뎠다.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정부의 안일한 대처가 사태를 확장시킨다. 그러고 보면 체르노빌에 이어 2011년 3월 11일 터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처음엔 사고를 축소 발표했었다. 경미한 문제가 있다고 발표했다가 화재가 커지니까 금방 진화될 거라고 호언했다. 주민 대피령을 내린 건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난 이후 발령났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중국 원전 실험 피해 규모도 경악할 수준이다. 1964년부터 1996년까지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비밀리에 행한 원전 실험으로 148만명이 방사선 오염 물질에 노출됐고 129만명이 각종 암에 걸려 사망했다고 한다. 중국은 핵실험 보안을 위해 150명의 최고정예요원으로 구성된 8023부대를 창설했다. 이들은 32년간 46번의 핵실험 현장에 근무했다. 물론, 허름한 작업복을 입었다는 점에서 체르노빌 소방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체르노빌 소방관들은 평소 작업복을 입고 진화 작업을 한 후 보름 만에 전원 사망했다.

 

그럼 원자력 발전소 23기가 있는 한국은 어떨까. 

 

최근까지 고장을 일으킨 고리 1호기를 보자. 고리 1호기는 1978년부터 상업운전을 시작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핵발전소다. 현재까지 국내 사고 건수 가운데 20% 사고율을 차지하는 고리 1호기는 매년 평균 3~4번 고장을 일으킨다.

 

배관 170km, 전기선 17.000km, 밸브 3만개, 용접 부위 6만 5천 곳. 이 정도면 어디가 문제인지 제 때에 파악하기 어렵다. '누더기 핵발전소' 고리 1호기는 파손 임계 온도가 1999년 이미 107.2도까지 상승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폭발하지 않은 걸 보면 한국 과학자들 기술이 좋거나 단군 할아버지가 수호해줬거나 동해 용왕님이 다독였다고 밖에 볼 수 없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 예상 시뮬레이션은 어떨까?

 

환경운동연합과 일본 관서학원대학 박승준 교수의 시뮬레이션 결과 고리 1호기 사고 피해 예상도는 이렇다. 급성사망 최대 4만 8천여명, 암사망 85만명, 경제피해액 최고 628조원. 이처럼 피해가 큰 이유는 고리 1호기 30km반경 안에 340만명이 밀집했기 때문이다.

 

고리 1호기는 울산시청과 부산시청에서 약 25km거리이고 고층빌딩과 아파트가 밀집한 해운대가 반경 20km에 포함된다. 따라서 부산의 중심지부터 서남쪽 일부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인구밀집 지역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체르노빌은 현재까지 반경 30km가 금지구역으로 지정했다. 최고 피해 지역을 30km로 잡았다고 안심할 수 없다.

 

무시무시한 공포 영화 같지만 방사능은 바람과 물, 지표면과 지하층까지 두루 영향을 끼친다. 영화 <해리포터>에서 생기를 빨아들이는 악령 볼드모트가 지상을 자유자재 넘나들고 꿈 속까지 점령하는 것처럼 말이다. 체르노빌은 물론 반경 수 백 킬로 떨어진 인근 국가까지 피폭자가 생겼다.

 

기계문명과 산업화 진전으로 에너지 사용량은 갈수록 증가한다. 그래서 정부는 가장 많은 양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핵발전소를 짓자고 주장한다. 은폐와 왜곡 작업은 언론을 통한 광고 나팔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원자력은 안전하고 깨끗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룰루랄라 광고가 깜빡 구라를 친다. 농담 아니고 실제 한국 원자력 연구원에서 몇 년전에 텔레비전 광고를 했다. 그럼 대안을 내 놔 봐요.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일본은 25% 의존도였던 핵발전 비중을 절전운동과 LNG 중심 화력발전,기업체 운영의 자가발전설비로 충당한다. 비록 화석에너지 사용 한계점이 문제되지만 핵발전소에 비하면 위험률이 낮다. 수 백만 명이 피부가 벗겨지고 암에 걸려 죽고 기형아가 태어나는 상황보다는 약소하다. 일본은 재생에너지 전력 의무구매법이 의회에서 통과됐다. 기업의 자가발전 시스템과 재생에너지 사용, 절전운동, 세 마리 토끼를 기른다.

 

한국은?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30년까지 핵발전소 10기를 추가 건설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독일 메르켈 총리가 원전을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한다고 선언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안 에너지에 대한 대책이 없기로는 박근혜 정부도 다르지 않다. '노후 원전 안전 철저'라는 앵무새 앵앵 읊는 소리가 공약이었다.

 

세계가 반핵을 넘어 탈핵으로 가고 있는 현실을 한국은 20세기 대재앙인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이웃 나라 일본의 후쿠시마 재앙을 보면서 뒷짐 지고 발전소 건설에 열병을 앓고 있다. 이래서 '원전 마피아'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원전 기둥 뒤에 토건 귀신 있다! 토건귀신! 토건귀신!

 

레이첼 카슨의《침묵의 봄》을 연상 시키는《체르노빌의 봄》은 만화책이다. 섬세하면서 사실적 묘사가 뛰어나다. 서두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쓴《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인용하는데 몇 문 장 옮기면 이렇다.

 

"창문 닫고 자. 발전소에 불이 났어. 빨리 들어갈게"...경찰들이 소리쳤다. "구급차가 피폭됐습니다...다가오지 마시오!"...."이 병원의 많은 의사, 간호사, 특히 간병인들이 얼마 후 아프게 된다...죽는다...하지만 그 때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나는 임신 중이었다. 그래도 어떻게 그를 남겨 둘 수가 있나? 그가 애원했다. "떠나! 아이를 살려!"....

 

"남편을 포옹하는 것은 금지였다. 만질 수도 없었다"..."손발의 피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온 몸이 물집으로 뒤덮였다"...."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 남편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 전염도가 높은 방사성 물질이에요."..."딸은 예정일보다 두 주 일찍 태어났다...그런데 간경화증에 걸린 아이였다...."...."4시간 후 딸이 죽었다고 했다."

 

구글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 태어난 기형아 사진을 볼 수 있다. 사람의 형상이 아니다. 팔, 다리 기형을 비롯해 눈알이 없거나 장기가 생기다 만 아이와 뇌가 노출된 아이도 있다. 헛구역질을 할 만큼 충격적이다. 그리고 더욱 충격적인 것은 27년이 지난 현재까지 체르노빌엔 4기의 핵발전소가 운행 중이고 2천여명의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핵은 질병을 치료하고 산업에너지로 유용하다. 하지만 체르노빌이 남긴 교훈은 이렇다. 그 모든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핵재앙은 예측 불가능하며 기술적, 경제적으로 해결 할 차원을 초과한다. 그럼에도 계속 원전만이 최고의 에너지 자원이라거나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겐 히로세 다카시가 《원전을 멈춰라》에서 했던 말을 들려 줄 필요가 있다.

 

"원자로는 대사고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인간이 있으면 도시에 원자로를 건설하도록 하자."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인간이 있으면 그 사람 집에 폐기물을 묻어주자."
"방사능의 피폭량에 대한 안전율을 말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들이 계산한 안전량의 플루토늄을 먹을 수 있는가 물어보자."
"방사능의 피폭 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는 통계 숫자를 제시하는 인간이 있으면 피해자 유족 앞에서 설명을 하게 하자."

 

                                                    ⊙체르노빌 원전 사고 피폭 희생 어린이들

 

사회적 질병의 말기 증세는 자기 신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맹신하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신념이 무엇이든 정의로 강조하고 강요하고 강제하는 권력자를 만날 경우 비극은 시작된다.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해체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가속화됐다. 원전 대재앙으로 인해 집단 농장 콜호스(kolkhoz)가 분해되면서 1987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를 표방하고 개방정책을 추진한다. 한 방에 훅 간 독재공산 체제는 반길 일일지 모르나 그 배경은 너무나 참담했다.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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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11.25 1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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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사람이 없었다. 자동차도 없었다. 언덕 아래 2, 3층 건물이 뜨문뜨문 있는 길을 지나 한 건물로 들어갔다. 단정한 옷차림의 한 여자가 나를 2층으로 안내했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2층 계단으로 오르면서 건물 앞에 강을 발견했다. 강은 꽤 컸다. 2차선 도로만큼 넓은 다리가 있었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는 자동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2층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렷하지 않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그와 가볍게 차를 마시고 혼자 건물을 나왔다. 다리 앞에는 절집이 있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육중한 일주문 뒤로 서너 명의 사람이 올라갔다.

 

“저, 다리 저쪽으로 가려면 어떡하지요?
 한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왜 다리를 건너고 싶었던 것일까. 다리는 멀리서 봤을 때보다 더 크고 넓었다. 화강암인지 시멘트인지 튼튼하게 세웠다. 다리 아래 강물은 검푸른 근육을 꿈틀대며 넘실댔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이상했다. 왜 이 다리를 아무도 건너는 사람이 없는 것일까. 자동차는 다 어디로 간거지. 왜 이 큰 다리를 나 혼자 건너는 것일까. 다리는 공중에 붕 뜬 것처럼 기묘했지만 계속 걸었다. 다리 건너 단층짜리 집들이 몇 채 강가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 뒷산엔 나무들이 울창했다. 자세히 보니까 숲에서 반짝반짝 불빛이 나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거는 꼬마전구와 같은 불빛이었다. 불빛은 숲 속의 작은 절을 중심으로 둥글게 퍼졌다.

 

“와아, 예쁘다

 

그런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한 기운이 점점 더 들었다. 다리 중간까지 걸어 온 나는 뒤를 돌아봤다. 사람도 자동차도 없었다. 아까는 회색이었던 다리가 검은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리 아래를 내려다 봤다. 다리가 없었다. 다리를 지탱하는 기둥인 다리가 없는 다리였다.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강 건너 숲 속에서 꼬마전구 불빛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무서움이 확 끼쳤다. 나는 다시 되돌아 왔다.

 

 

 

 

어제 꿈 얘기다. 아침에 이 꿈을 해몽하느라고 꽤 야릇했지만 하루가 무사히 지났다. 때마침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 꿈 얘기를 했다. 친구는 혈압을 조심하라는 걱정과 함께 밤늦게까지 책을 읽어서 그런 것 같다는 총평으로 결론을 내렸다.

 

늦은 밤에 책을 읽으면 눈이 뻑뻑하다. 읽은 책에 따라 꿈도 다르다. 스티븐 킹이 쓴 소설《미저리》를 읽은 밤에는 밤새 다리를 공격하는 악당에게 쫓겼다. 꿈속에선 뜀박질이 안 된다. 진땀났던 밤이다. 수전 손택의《타인의 고통을 읽고 잔 밤은 악몽을 꿨다. 책에 나온 무서운 사진 때문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누군가를 잔혹하게 죽이고 환호했다. 좀비집단이었다. 그들은 무서워 겁에 떠는 다른 사람을 무대 위로 끌고 가서 강제로 옷을 벗기고 채찍으로 때리더니 나무 기둥에 매달았다. 피해자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 나를 보고 구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는 관찰자였지만 무서워서 도망쳤다. 꿈에서 깬 후에는 어찌나 흥분을 했는지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남들은 꿈 잘 꿔서 로또 당첨 행운이라도 박터진다는데 기껏 밤늦게까지 책 읽지 말라는 조언이나 듣자니 한숨이 나왔다. 안 그래도 눈이 침침해져서 밤에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 다음 날 몹시 피곤하다. 요즘 종이책은 형광물질이 들어간 탓에 조명에 반사가 되서 안구 피로도가 더 심하다. 게다가 밤에는 두뇌회전도 잘 안되서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날이고 다다음날이고 몇 번에 걸쳐 문장을 고치기 일쑤다.

 

뒤숭숭한 꿈자리든 침침한 눈이든 상상력 부재의 문장이든 모든 게 노화 탓이라고 돌리지만 변명이 궁색하다. 여하간에 기묘한 꿈과 뻑뻑한 눈을 들먹이며 친구는 킨들(kindle) 권했다. 킨들, 얼마야. 이제껏 전자책 이용에 관해서 진지하게 고려한 적이 없었던 내가 어느새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10만원대에서 30만원대까지 다양했지만 부담스럽다. 한국판 킨들로 불리는 크레마 역시 10만원대였다. 원고료에 의지해서 한 달을 생활하는 필자 입장에서 고액 원고료가 아닌 다음에야 크레마나 킨들은 강 건너 반짝이는 예쁜 불빛에 불과하다. 닿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는 건 예쁘고 안타까운 법이다.

 

 

 

 

가벼운 한숨으로 킨들을 날려 보낸 후(환상의 끝은 언제나 슬픈 법), 영화를 봤다.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잭 니콜슨과 다이안 키튼, 키아누 리브수가 나온다. 환갑이 넘은 잭 니콜슨은 ‘왕년의 플레이보이’ 출신이다. 지금도 미모의 젊은 여성과 데이트를 즐기는 타고난 작업꾼이다. 다이안 키튼은 자아가 강하고 명랑하고 지적인 작가다. 젊은 미남 의사 키아누는 이런 다이안 키튼을 좋아하고 있다.

 

어느 날 잭은 경매사 직업을 가진 젊은 여성과 그녀의 엄마 별장으로 주말 여행을 떠났다. 잭은 섹스를 시도하다가(하지 못했다) 심장발작을 일으켜 응급실로 실려간다. 때마침 여동생과 주말을 보내러 별장에 갔던 다이안은 의도치 않게 딸의 남자친구를 돌봐줘야 할 상황이 된다. 다이안은 딸이 나이 많은 남자와 만나는 게 싫다. 그래서 잭과 다이안은 사사건건 부딪친다. 그러던 차에 20년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젊은 의사 키아누가 다이안에게 청혼을 한다.

 

이 영화는 해피 엔딩이다. 늙다리인 내가 남녀관계는 새삼스럽지 않고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하겠다. 계단 한 줄 조차 뚜벅뚜벅 오르지 못하면서 여자에게 흑심을 품은 주책바가지 잭이 동년배의 다이안에게 마음이 흔들려 수작을 건다. 젊은 의사와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밤, 잭은 다이안에게 지금 주방 앞에서 만나 출출한 배를 채우자고 컴퓨터 메신저를 보낸다. 

 

“우리 파자마 파티 할래요?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던 다이안은 메시지를 보고 주방으로 갔다. 파자마 차림으로 주방에서 만난 두 사람. 주방에서 재미있는 담소를 나누는 동안 카메라는 그녀의 서재로 이동한다. 다이안이 그동안 바다에서 주워 모은 하얀 조약돌을 담은 볼이 있다(나도 모은 조약돌이 있다). 하얀 조약돌이 한 그릇 가득하고 맨 위에 검은 조약돌 한 개가 살포시 놓였다. 잭이 낮에 해변에서 주운 돌이다. 

 

‘파자마 파티(paja party)’는 파자마 차림으로 만나서 음식을 먹거나 담소를 나누거나 하는 한 밤 중 만남을 일컫는다. 늦은 밤 잠옷을 입고 만나므로 허물없는 사이여야 한다. 영화 속에선 목욕가운 같은 파자마에 허리를 매는 잠옷을 입고 만난다. 

 

잠옷 얘기가 나왔으니까 첨언하자면 개인적으로 가장 섹시한 잠옷으로 치는 건 한복 속치마다. 한복 안에 입는 속치마는 끈으로 가슴을 꽉 조인다. 치마를 벗는 방법은 가슴에 묶은 끈을 풀면 된다. 서양식 속치마나 페티코트처럼 머리 위로 올리거나 다리 아래로 벗길 필요가 없이 간단하다. 이런 잠옷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와는 한 이불 속에서 잘 이유가 없다....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내게 필요한 파자마 파티 상대는 따로 있다.

 

늙느라고 침침해지는 눈과 안 돌아가는 뇌를 대신해서 그럴듯한 단어나 문장을 대신 검색해주는 파자마 파티. 그럴수만 있다면 흉몽을 꿀 일도 없고 지금보다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킨들 따위는 가볍게 비웃고 당분간 흉몽은 참을 수 있다. 정말 그럴거냐는 질문은 하지 마시라. 이건 글이 안 써져서 하는 궁색한 뻥이다.

 

 

(진지하게 각잡고) 김현 선생은 1989년 12월 12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선생은 1990년 6월 27일 작고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병이 깊어 죽음에의 징후를 처절하게 느끼면서 쓴 글이다. 김현의《행복한 책 읽기》는 이렇게 끝난다.

 

이 책은 현재 모 박물관 관장인 지인으로부터 받았다. 책갈피에 끼워 둔 편지를 펼쳤다. “지난번 제 옆지기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주셔서 옆지기와 제가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희 부부의 가슴을 따스하게 파고듭니다. 그리고 쓰신 글 가운데서 근원수필’(무서록 포함)이라는 책을 알게 되어서 지금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늘 좋은 글로 저희 부부를 감동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구요. 행복한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07년 5월 11일 OO 드림

 

체리색 편지에 쓴 이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황야에서 헤매던 한 마리 거친 여우같던 내가 책으로 인하여 과분한 친구를 얻었다. 비록 킨들은 없지만 오랫동안 책으로 인연을 가꾸는 벗을 만났으니 ‘행복한 책 읽기’는 틀림없다. 하지만 로또가 당첨된다면 킨들부터 살 것이다! 크레마는 어때?

 

킨들(kindle)은 (불이) 타기 시작하다, (불을) 붙이다. (관심・감정 등을) 불붙이다는 뜻이다. 기묘할세.

 

 

 

 

1. 이런 뻥을 치는 것은 비 때문입니다.

2. 지난 연말 시애틀에서 예쁜 카드를 보내주신 Snow님께 늦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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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학, 모든 철학, 모든 역사는 곧 고귀한 행동을 만들어내는 동기입니다. 하지만 만약 기록된 글을 통해 빛이 비추어지지 않는다면, 이러한 동기조차도 자칫 암흑 속에 묻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문학에 탐닉하는 사람으로서 아무 부끄럼 없이 고백하고 싶습니다. 저는 책이 너무 좋아 세상을 등지는 것조차도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저의 독서가 친구들의 선하고 훌륭한 행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는 잘 모릅니다. 저는 독서의 과실을 모든 이의 눈앞에 어떻게 펼쳐 보여야 할지도 잘 모릅니다. (......) 독서는 우리의 젊은 날에 신선한 자극을, 또한 노년에는 여유 있는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독서는 우리를 성공적인 삶으로 이끄는 마법을 발휘하기도 하고, 우리가 실패했을 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천국을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독서는 집에서는 크나큰 기쁨이오. 바깥에서는 아무 것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잠 못 이루는 밤에도, 모든 여행에서도, 시골에서 한가하게 보낼 때도, 독서는 우리의 가장 충실하고 믿음직한 동반자입니다.”

                                             -<시인 아르키아스를 변호함>.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위 인용 글은《젠틀 매드니스》에 수록한 글로 독서에 대한 찬양과 책에 대한 경의로 충만하다. 문학담당 칼럼니스트인 저자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가 쓴 이 책은 천 페이지가 넘는다. 내가 소장한 여러 권의 ‘목침도서’ 가운데 한 권이다. 초판 1쇄 발행본에 집착하는 나는 2006년 1월 20일 발행본을 갖고 있다. 제목에서처럼 책에 미친 사람이라면 구입 즉시 읽어주는 게 이 책에 대한 예의다.

 

《젠틀 매드니스》는 치유하기 어려운 질병인-책 수집가-애서광-의 이야기다. 매드니스(madness)는 우리말로 ‘미친’이라는 의미가 강하지만 책 속에서는 ‘탐닉’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정확한 어의(語義)로는 ‘미친’과 ‘탐닉’은 다르다. 그런데 교양과 품위를 갖춘 책이 대상이다 보니 ‘탐닉’이라는 단어로 대체한 듯싶다.

 

책 덕후라면 ‘미쳐도 곱게 미친’ 사람들이라는 오해를 살 수 있지만 곱게 미칠 리가 없다. 가산탕진은 물론이고 희귀본 편집증으로 자신의 가죽을 표지 장정에 써달라는 사형수도 있다. 힘들게 구한 책이 세계 유일본이 아님이 밝혀지자 절망해서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오직 책이 좋아 도서관에서 책을 훔친 순정한 책도둑도 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사들이는 바람에 가진 돈을 전부 써버려서 마지막 남은 동전 한 닢으로 빵 대신 책을 사서 읽고 죽은 이도 있다. 그러나 책에 미친 사람들에게 가장 행복한 마지막 장면은 책을 읽다가 죽는 것이리라.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온화한 햇빛을 받으며 책을 읽다가 맞는 죽음은 ‘독서가의 완성’이 아닐까. 16세기 유럽에서 있었던 실화다.

 

다시 키케로의 글로 돌아가 보자. 키케로는 탐서광이었다. 웅장한 서재를 장만해 장서를 보관했다. 읽고 싶거나 소장하고 싶은 책은 거액을 들여 구했다. 정치인 키케로는 ‘노년을 위한 각별한 준비’로 서재를 꾸몄다. 은퇴 후, 책을 읽으며 번잡한 세상사를 잊고 지적이며 영적인 풍성함으로 행복을 꿈꿨다. 하지만 어떤 책은 너무 비싸 부담스러웠다. 당시 책은 양피지에 필사한 형태로 많은 수공과 함께 희귀본으로서의 가치를 지녔다.

 

 

 

 

 

독서가, 서평가, 출판 칼럼니스트. 나를 부르는 호칭들이다. 이외에도 작가라는 말을 듣지만 창작을 발표한 적이 없는 나로서는 작가라는 이름이 분에 안 맞는다. 여하간, 나도 책에 미친 사람 가운데 한 명인 것은 분명하다. 몇 년 전까진 병적인 수집욕으로 미친 듯 책을 샀다.

 

수입이 거의 없다보니 안 먹고 안 입고 안 쓰는 ‘3 안’ 생활이었지만 도서구입비용은 예외였다. 돈이 들어오면 보관함에 담아둔 책 목록부터 열었다. 읽지 않은 책과 읽은 책이 벽돌처럼 오두막을 차곡차곡 채웠다. 책장 안에서 겹겹이 포개졌던 책은 바닥과 통로를 차지했다. 청소가 불편해지자 먼지가 늘었다. 기침이 잦고 비염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저금통장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가산탕진의 최후를 통보했다.

 

포도 한 송이 사 먹는 대신 책을 샀다. 헤진 옷소매를 기워 입으며 책을 샀다. 영양크림 사는 돈은 아까워도 책값 지출은 망설이지 않았다. 누가 책 선물을 하겠다면 앞뒤 생각 없이 덜컥 받았다. 나중에 그와 소원한 사이가 되어도 남은 책은 로시난테(돈키호테가 부린 말)처럼 말없이 나의 그림자를 지켜봤다. 장르불문. 언어불문. 작가불문. 취향불문. 불문으로 오두막의 밤을 밝히고 책을 읽었다. 정확하게 세어보진 않았지만 시집과 문고판 도서까지 합해서 4천여 권 정도의 책이 10평짜리 마루를 차지했다.

 

봄이었다. 개나리가 막 꽃잎을 열 때였다. 꽃샘바람이 쌀쌀해서 보일러를 틀었더니 기름이 없다. 통장엔 돈이 없고 염소는 트럭에 실려 가기에는 일렀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별 일 없는 듯, 괜찮은 듯한 일상이었다. 한순간 억누를 수 없는 슬픔과 한숨이 해일처럼 덮쳤다. 3일 동안 정리 했다. 작업은 한밤중까지 진행됐다. 책을 사 들일 때 미쳤던 것처럼 책을 버리는 일도 미친 듯이 해치웠다. 절반가량의 책이 5일 후, 용달차에 실려 떠났다. 왼 손에10여만 원을 들고(후하게 받았다) 떠나는 책에게 오른손을 들어 작별을 고했다. 그 후, 한 번 더 책을 떠나보냈다.

 

절판본, 희귀본, 고서화처럼 경매시장을 노린 경우도 있지만 책 수집의 첫 번째 이유는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전문 컬렉션만 수집해서 몇 천권이나 몇 만권을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전 방위적으로 수집해서 질보다 양을 추구하는 수집가들은 키케로처럼 장서각을 따로 만들기도 한다. 물론 태어날 때 금수저를 입에 물고 나오는 사람은 비용 걱정을 안 한다. (그러나 대체로 부자는 책보다 금융투자에 관심이 높다)

 

책 덕후 가운데 ‘가산탕진의 묘미를 즐기는 사람’은 대부분 부자가 아니다.《젠틀 매드니스》에 나오는 돈 없는 탐서광은 이렇다. 집을 담보로 은행에 저당을 잡히고, 가재도구를 팔고, 부자 아버지에게 구차한 설명을 늘어놓으며 저리 이율로 빌린다. 마음 착한 후원자를 만나면 헤이븐 오모어처럼 “나는 그냥 수집가가 아니다. 최고 수집가라 불러다오!”하며 허풍을 떨 기회도 찾아온다.

 

 

 

현재 나는 탐서광이 아니다. 하루 백여 권의 신간이 출간되지만 관심도서는 적고 그나마 수중에 들어오는 책은 더 적다. 가산탕진 마귀에 덧씌운 과거와 비교할 때 도서 구입 지출조차 현격히 줄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언제고 저금통장이 오동통 살이 오르고 불현듯 책을 향한 욕망이 불붙기 시작하면 책에 미치는 일은 순식간일 것을. 그리하여 저금통장을 다 태우고 오두막을 점령당하는 날이 다시 올 것을.

 

“(가산탕진을 감수하면서) 책에 미치는 일이야말로 미친 짓이죠”

멀뚱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만 이 말은 뻥이고 사실은 책 덕후의 열망을 감추는 나의 페르소나다.

 

지난 9년 동안 책 덕후가 되어 책을 읽고 두 권의 책을 썼다. 사 들인 책값을 따지면 손해 보는 장사다. 하지만 책은 신산하고 서늘한 타향살이를 위로하며 건조한 영혼에 농익은 기름을 부었다. 이른바 비블리오테라피(Bibliotheraphy)를 실현한 것이다. 비오고 바람 불고 춥고 설운 불면의 밤, 나는 그 기름으로 불을 밝히고 다시 책을 펼쳤다.(이봐요. 친구 한 명 없이 촌구석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소?) 따라서 염소치기 탐서광에서 비블리오파일(bibliophile. 서평가)로 변한 것은 책 덕후 결과다.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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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오십 전까지는 나는 정말 한 마리 개와 같았다.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어대자 나도 따라 짖어댄 것일 뿐, 왜 그렇게 짖어댔는지 까닭을 묻는다면, 그저 벙어리처럼 아무 말 없이 웃을 뿐이었다.”

 

위 글은 명말 양명학 좌파학자였던 이탁오(李卓吾. 본명 이지(李贄) 1527년~1602년)가 쓴《분서》에 실린 글이다. 이지는 지방관료 출신으로 쉰 살에 퇴직하고 전국을 유람하며 학문을 키웠다.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며 남녀평등과 개인가치를 설파한 사상가였다. 봉건왕조시대 법과 원칙을 좇았던 관료출신 이지는 방대한 독서를 통해 능동적이고 주체적 인간으로 변한다.

 

 

 

《분서》가운데 가장 유명한 글은 ‘동심설(童心說)’이다. ‘동심’이란 ‘아이 마음’이다. 거짓 없고 순수하고 참된 마음으로 최초 일념(一念)의 본심(本心)이다. 아이 마음은 사람의 생애에서 처음 가지는 마음, 즉 첫 마음이다. 첫 마음은 진심이다. 그런데 이 첫 마음은 성장하면서 변한다. 견문을 넓히고 교제가 활발해지면서 도리를 따지고 손익 계산을 하게 된다.

 

세상의 때가 묻은 마음은 더 이상 동심이 아니다. 사회적 의무에 순응하고 이해타산에 얽혀 거부하는 마음이 자리 잡는다. 그러다보니 외적인 입장을 중시하고 내면의 붕괴를 볼 수 없다. 이지는 부화뇌동과 현혹에의 굴복을 두고 ‘앞의 개를 따라 짖는 개’에 비유했다. 첫 마음. 진심은 외부 영향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순진무구함은 초지일관이며 바탕에 뿌리가 깊다는 의미다.

 

선생(이탁오)은 한평생 읽지 않은 책이 없고 가슴 속에 품었다가 토해내지 않은 말이 없었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함은 마치 먹고 마시는 일에 기갈난 사람처럼 굴어 충분히 배부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 분은 토해내지 않은 말이 없었는데, 흡사 음식물을 먹다가 목에 걸리기라도 한 듯 죄다 구토로 토해내지 않으면 또한 멈추지 않으셨다.”

 

이지의 제자 왕본아의 말이다. 토하듯 글을 쓴 이지의《분서》는 어느 한 문장 쉽게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로 힘이 넘친다. 단단하고 탄력적이며 원기 왕성한 이지의 사상이 글자마다 농축되었다. 꾸미지 않은 진솔한 동심으로 이어진 문장은 탄식을 자아낸다. 따라서 ‘앞의 개를 따라 짖는 개’ 비유는 나르시시즘을 버린 정직한 자기응시이자 자각다. 자기욕망을 익명의 대상에게 투사해서 배설하지 않고 합리화해서 면제받으려는 의도를 버렸다. 철저히 이성적이고 냉정한 자아관찰로 자신이 저지른 오류를 위장하지 않고 실체 그대로 본 결과다.

 

이지의 ‘동심설(童心說)’을 읽는 섣달 그믐밤, 한 해 동안 읽은 책과 쓴 글을 추슬러보니 아찔하다. 6월에 새 책을 세상에 냈지만 글 농사가 시원치 않다. 독서량도 현저하게 줄고 고구마 줄기를 끌어 올리듯 주제별 독서도 못했다. 이러저런 일들이 있었지만 첫 마음을 잃은 탓이다.

 

사는 게 신통치 않다는 핑계를 들어 사람의 얼굴로 짐승의 마음을 품고 개소리를 냈다. 이와 같이 첫 마음을 잃으면 황야의 이리처럼 거친 성정과 나태한 자아가 찾아온다.

 

나는 곧 쉰 살이 된다. 여전히 쉽게 흥분하고 경박하며 뻥을 쳐서 자기은폐를 시도하는 철없는 사람이다. 한 살을 더 먹어도 찌질하고 한심하게 살겠지만 새해에는 의젓하게 살자는 섣부른 기원 따위는 하지 않겠다.

 

다만, 이미 잃은 첫 마음일지라도 가끔 먼지 털다 보면 어느 것이 뻥이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 조금 알게 되어 무작정 따라 짖는 개만 안 되면 다행이다.

 

 

군소리)

2009년 출간한 첫 책《깐깐한 독서본능》에서 나는《분서》를 읽은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_“분서를 읽는 동안 슬프고 외로웠다. 분서 속의 이지가 자꾸 술을 권했음을 고백한다. 다수와는 다른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고 결국에는 스스로 목에 칼을 그어 죽은 인간 이지의 고독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해서, 이지를 읽을 독자라면 냉장고에 술병을 댓 병 대기시킬 것은 권한다.”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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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택배를 보낼 책꾸러미가 있어 우체국 가는 길에 고양이를 만났다. 초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가던 참이다. 등짝에 고등어 무늬가 선명한 어른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옆에 앉아 있다. 도망을 안가길래 손을 내밀었더니 까칠까칠한 혀로 손등을 핥는다. 그래서 등짝을 살살 쓰다듬다가 목을 간지럽혔더니 발라당 눕는다. 사람 손을 많이 탄 애교 많은 녀석이다. 볕 좋은 담장 옆에 있던 것으로 봐서 학교 근처 누구네 집 고양이 일것이다. 고양이와 5분여 가량 애정을 나누다가 일어났다.

 

우체국에서 택배를 부치고 길 건너 농협 마트에서 꼬마 소세지 두 개를 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손등을 핥아준 보답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등어 녀석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약속장소에 끝내 나타나지 않는 변심한 애인을 찾는 것 마냥 황망한 눈동자로 근처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별의 발걸음을 무겁게 돌렸다. 하지만 사랑은 떠나도 추억은 남는 법. 주머니에 소세지 두 개를 넣고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서 만화책을 뒤적였다.

 

 

루이스 세풀베다의 동화『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에는 고아가 된 아기 갈매기를 양육하는 네 마리 고양이가 나온다. 어느날, 선박에서 유출된 기름에 빠진 엄마 갈매기가 죽는다. 엄마 갈매기 장례식 때 항구 고양이들은 달을 향해 목을 쭉 빼고 장송곡을 불러줬다.

 

졸지에 엄마를 잃은 아기 갈매기는 아직 부화되지 않은 알이다. 고양이들은 엄마 갈매기의 유언에 따라 갈매기 알을 품에 안고 부화하는데 성공한다. 아기 갈매기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고양이들은 서가에 모여 ‘아포르뚜나다’라는 이름을 짓는다. ‘아포르뚜나다’는 스페인어로 ‘행운아’라는 뜻이다.

 

어느 덧 성장한 아포르뚜나다에게 고양이는 “인간을 조심하라”고 가르친다. 이유를 묻는 아포르뚜나다에게 고양이는 말한다. “인간들이란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존이란 우리와는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인정하는 일이야.”

 

고양이를 의인화한 이야기는 많다. 4인조 록밴드 체리필터는 생선가게 터는 일을 관두고 바다로 씩씩하게 떠나는 ‘낭만 고양이’를 노래했다. 월트 디즈니가 창조한 검은 고양이 톰은 한주먹도 안 되는 생쥐 제리에게 만날 골탕을 당한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가지만 대부분 과욕이 화를 부른다. 전세계에 유명세를 떨친 검은 고양이 톰은 유감스럽게도 아프리카에선 인기를 얻지 못했다.

 

아프리카에선 검은 고양이를 재수없는 동물로 친다. 아침 출근길 일지라도 검은 고양이를 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일진이 안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이런 이유로 검은 고양이가 나오는 <톰과 제리>는 아프리카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래서 <톰과 제리> 아프리카 배급용은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회색 고양이로 수정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양이는 사람과 같이 소파 위에 누워 비디오를 본다. 헤르만 헤세는 스위스 몬타뇰라 언덕 위 집에서 살 때 두 마리의 고양이를 키웠다. 고등어 무늬를 가진 태국산 샴 고양이 후손과 목과 배에 노르스름한 갈색을 띤 고양이다. 고등어 무늬 고양이 이름은 티거, 갈색 고양이는 레베라고 불렀다. 독일어로 티거는 호랑이이며 레베는 사자다. 두 고양이는 헤세의 포도밭과 서재를 종횡무진 누볐다. 고립된 거주지에서 친구 한 명 없이 혼자 농장일을 하고 글을 쓰던 헤세에겐 둘도 없는 친구였다. 

 

 

 

 

고양이를 다룬 작품 속에서 고양이는 똑똑하다 못해 때로는 인간을 무시한다. 인간에게 훈수를 두는 고양이는 인간이 그려낸 또 하나의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이런 고양이는 어떤가. 인간에게 발칙한 질문을 던지고 조롱하고 다른 해석을 내려서 논쟁을 즐기는 회색 고양이 ‘무즈룸’은 탈무드를 읽는 고양이다.

 

『랍비의 고양이』의 주인공 무즈룸은 일곱 살이다. 사람으로 치면 쉰 살이 다 됐다. 한 집에 거주하는 랍비 아저씨를 졸졸 따라 다니지만 랍비의 딸 즐라비야 아가씨와 노는 걸 더 좋아한다. 무즈룸은 즐라비야가 자기를 사랑해서 쓰다듬고 놀아준다고 여긴다. 사랑은 같이 있고 싶고 만지고 싶다. 같이 호흡하고 밀어를 나누고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자고 싶다. 마침내 무즈룸은 아가씨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다. 그런데 세상일이란게 순탄치 않다. 연적은 가까운데 있는 법. 즐라비야는 앵무새를 좋아해서 앵무새와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 질투에 눈이 먼 무즈룸은 수다쟁이 앵무새를 확 잡아먹는다!

 

사랑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셰익스피어는 절규하지만 무즈룸은 연적을 제거하고 사랑도 지킨다. 게다가 말문이 트이는 기적까지 얻었다. 죽은 앵무새 입장에서 보면 저승에서도 눈을 못 감을 원통한 일이지만 말하는 고양이 무즈룸의 뻔뻔함은 못 당한다. 무즈룸은 앵무새를 찾는 랍비에게 앵무새는 사라졌을 뿐이라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랍비로부터 거짓말쟁이라는 의심을 받지만 무즈룸은 이에 굴하지 않는다. 

 

인간의 말을 하기 시작한 무즈룸은 랍비에게 성인식을 치루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랍비를 따라 자신도 유대교 신자라고 우긴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 계율에 엄격하고 원칙주의자인 랍비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무즈룸의 요구를 거부한다. 훌륭한 유대인이라면 거짓말을 하지 말것이며(무즈룸은 앵무새를 죽이고 맨 처음 한 말이 앵무새가 저절로 사라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몸을 드러내 놓고 다니는 여자는 불경하며(고양이는 인간처럼 옷감으로 몸을 감싸지 않는다),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의식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것(고양이는 도발적이고 순간적이다)이다.

 

그러나 원칙주의자 랍비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무즈룸은 자기만의 사상탑을 만든다. 유대교 경전이 인간의 본능 위에 군림한다는 이론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무즈룸은 도덕과 윤리가 경전에 따라 결정된다면 그것은 인간을 조롱하는 신의 고약한 놀이라고 여긴다. 인간에겐 신의 엄격함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우연성과 본능이 있다. 철학적 해석으로 상황윤리라고 부른다. 그래서 연약하고 부도덕한 개인은 신에 자신을 의탁함으로써 도덕심과 윤리를 통제받고자 한다. 타율성에 강제하면서까지 궤도를 지키려는 게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아랍인 사창가를 드나드는 젊은 랍비를 무즈룸은 이해한다. “그가 엄격하고 도덕적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를 미워했었지. 그런데 그가 이중적이고 위선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그가 호르몬과 신념 사이에서 몸부림 치는 것을 본 지금, 난 그를 사랑해.”

 

무즈룸과 랍비의 논쟁은 흡사 무신론자와 랍비의 논쟁처럼 흥미롭다. 이런 대화는 무즈룸의 완승으로 본다.

 

랍비: 인간은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무즈룸 : 신의 형상을 보여달라.

랍비 : 신은 말씀이다.

무즈룸 : 나도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신의 형상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 여부와 영역은 섣불리 단정짓기 어렵다. 목회자와 종교연구가, 종교학자들과 철학자들과 심지어 만화가들까지 신을 연구하는 일에 골몰하지 않던가. 그래서『랍비의 고양이』작가이자 무즈룸의 주인인 조안 스파르는 신의 존재여부를 이렇게 말한다.

 

“신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기도 하고 공허감과 부재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하지요. 현실 속에서 그 이면에 새겨진 신의 존재를 찾아내야 하는 거에요.”

 

고양이 무즈룸은 독자를 향해 묻는다. “너네 인간세상은 왜 그 모양이야?” 매사에 복잡하게 일을 만들고 끙끙대는 인간을 향해 무즈룸은 “바보!”라고 혀를 찬다. 쥐뿔도 잘난 것 없는 인간이 아는 척 하고, 가진 척 하고, 잘난 척 하는 꼴을 보면 무즈룸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본다. 무즈룸아, 인간이 그 모양이란다.

 

『랍비의 고양이』작가, ‘조안 스파르’는 영어권에선 ‘요안 스파’로 불린다. 작가 정보를 검색하다가 만난 두 개의 이름은 불어권과 영어권의 원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치하지 않는 발음상의 표기’같다. ‘스파(sfar)’는 히브리어로 ‘쓰다’라는 뜻이고 아랍어로는 ‘노랗다’는 뜻이다. 한 단어이지만 의미가 갈린다. 하물며 말도 이렇듯 해석이 나뉘는데 인간끼리 한 마음을 같기란 얼마나 요원한 미로인가.

 

『랍비의 고양이』에선 아랍과 유대관계를 대입하면서 ‘해석의 문제’를 제시한다. 인간의 갈등은 문제의 발단이 말이든 마음이든 ‘해석의 차이’ 로 빚어진다(써놓고 보니 우울하다).『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에서도 해석의 차이를 가리킨다. “인간들이란 꽤나 복잡한 동물이야! 우리 갈매기들은 세계 어디서나 똑같은 말 한마디면 다 통하는데 말야.” 그러고보면 우화를 읽을 때마다 인간은 멍청하고 인간을 제외한 동물은 똑똑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 조안 스파르와 고양이 무즈룸, 그리고 윤미화와 고양이 앙(제 고양이는 지금은 하늘나라에)

 

 

총 6권 시리즈로 나온 ‘만화『랍비의 고양이』’는 한국에선 현재 2권까지 출간했다. 불어권에선 5권까지 나온 이 책은 1930년대 알제리가 배경이지만 현대에 맞게 각색이 뛰어난 작품이다. 작가가 키우는 고양이가 무즈룸 캐릭터로 직접 등장해서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거친 듯 하면서도 자유로운 선과 어둡고 강렬한 색상의 교차가 ‘경전/무거움/의도적<=>현실/가벼움/즉흥적’의 배열을 잘 표현한다. 

 

고양이에게 줄 소세지를 대신 먹으면서 ‘즉흥적인 고양이 잡담’글을 쓰다. 야옹~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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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상으론 찬이슬이 내린다는 백로도 지나고 김장 배추를 심을 철이다. 콧물과 재채기는 뜸하지만 대신 두통이 사라지지 않고 열이 내리지 않아 일 할 염두를 못내고 있다. 소화불량까지 겹쳤다. 웬만해선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는 편인데 이틀전 과음이 원인이었던 듯 싶다. 

 

오늘은 기력을 조금 회복해《독과 도》를 쓰게 된 계기를 정리한다. 이 글은 패션문화잡지《헤렌》8월호에 실렸다.(완전 뒷북^^;) 송고한 글은 길었지마 잡지에는 축소 수록됐다. “책에는 길이 있다지만, 그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 현명한 책 읽기를 통해 더 나은 인생을 담보받은, 북홀리커 5인의 뜨거운 고백 ”이라는 소개로〈책 읽기의 구애〉에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그래도 책 읽기는 계속된다》를 쓴 로쟈 이현우, 《책은 도끼다》의 광고인 박웅현, 《정여울의 소설 읽는 시간》을 쓴 문학평론가 정여울, 《삶을 바꾸는 책 읽기》를 쓴 CBS 라디오 PD 정혜윤의 글이 실렸다.

 

 

- 이번 신간 <독과 도>를 집필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제목은 편집부에서 지은겁니다. 요즘 “~해도 괜찮아” 시리즈 책이 붐입니다. “~해도 괜찮아”는 허용, 관용, 너그러움, 포용, 해제를 의미하죠. 실패해도 괜찮아, 너 그래도 괜찮아, 니 뜻 한 번 펼쳐봐 그런 뜻이죠. ‘괜찮아’ 시리즈가 출판 붐을 불러온 배경은 억눌린 게 많다는 반증이라고 봅니다. 지금 그대로의 방식으로 살기에는 ‘안 괜찮은’ 사회라는 거죠. 이런 현상을 독(毒)이라고 봅니다.

 

FTA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비정규직이 늘고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예전에 임금생활자였던 계층이 어느 날 무단해고 당할 위험이 커지고 여기에 주택 교육, 의료, 복지 문제가 도미노처럼 쓰러뜨리는 거죠. 정직하고 성실한 노동이 더 이상 생활의 안정을 보장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불안한거에요. 나도 어느 날 추락할 수 있겠구나 싶은 거죠. 불안감은 인간관계를 불신하게 만듭니다. 경쟁 심리에 지배당했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돈을 더 많이 벌거나 사회적 지위를 얻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 될 것 같거든요.

 

그래서 동료나 친구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냉소적으로 대하죠. 사회 전체가 이런 분위기로 간다면 그 사회는 인간 존엄성을 잃은 사회가 됩니다. 사람이 쓰고 버리는 소모품처럼 취급되면서 무단해고가 만연해졌잖아요. “너 이제 필요 없어” 하는 거죠.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요.

 

자본과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루아침에 쓰다버린 나사못처럼 사회로부터 버려질 수 있다는 거죠. 저는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있지만 뉴스를 통해 사회가 요동치는 것을 봅니다. 불신이 미움과 증오로 변해서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신과 증오의 시대인 것처럼 보였어요. 불신과 미움은 광기로 변해 상대방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게 싫든 좋든 우리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소속된 사회가 독에 찌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독의 치유 방법을 찾으려면 독의 근원을 정면 응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실 확인은 아픈 일이지만 문제의 근원에 답이 있다는 것을 주시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일종의 ‘말 걸기’죠. 저는 책이란 사람들과의 ‘말 걸기’라고 봅니다. 책을 통한 대화이지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인거죠. 왜냐하면 책은 사람이 쓴 결과물이니까요.

 

이런 대화를 통해 우리 사회를 우울하게 만든 독의 근원을 해부하고 싶었습니다. 해부를 하면 무엇이 독이었는지 볼 수 있잖아요. 그리고 비로소 “~해도 괜찮아”라는 처방전을 기대했던 거죠. 해부를 통해 독의 원인을 찾을 때 억눌린 자아나 은폐된 현실이 비로소 투명하게 보이고 나아가 무장해제하지 않겠나 싶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독서를 통해 겹겹이 층을 이룬 자신과의 불화, 세상과 나의 불화를 정리하는 것이 도(道)라고 봅니다.

 

- 자신의 책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의 '독서에세이'가 꾸준히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런 책들 사이에서, <독과 도>만의 특징, 혹은 강점이라 생각하는 부분은? 또 전작 <깐깐한 독서본능>과의 차이점.

서평집이 책 소개나 정보에 그친다면 독서에세이는 곁다리 이야기가 개입합니다.《독과 도》는 책을 매개로 삼은 곁다리 이야기입니다. 책 속의 이야기가 곧 우리가 사는 세상임을 가리킵니다.

 

《독과 도》는 정치, 경제, 환경, 문화, 문학, 철학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다루고 있지만 공통주제는 ‘인문(人文)’입니다. 인문(人文)을 다르게 말하면 인문(人紋)입니다. 사람의 무늬죠.《깐깐한 독서본능》이 책을 좋아하는 한 명의 독자입장에서 책에 미쳐서 책에 국한된 이야기를 풀었다면,《독과 도》는 책을 통해 사람을 주시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좀 더 사람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것이죠. 나아가 책이 곧 세상이고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앓이’를 글로 엮은 것이《독과 도》입니다.

 

             8월 8일 독자와의 대화. 수줍고 설레였던 시간. 가운데 안경쓴 흰셔츠가 접니다.

 

 

- 작가님만의 ‘책 사랑법’이 궁금합니다. 책이 너덜해지도록 줄을 치고 메모를 하는지, 신간을 선호하는지, 구입하는 책과 빌려보는 책의 비율과 선택의 이유 등.

특별한 ‘책 사랑법’은 없습니다만 책에 줄을 치거나 메모를 남기지 않는 편입니다. 불가피하게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연필로 흐릿한 표시를 합니다. 나중에라도 발견하면 지웁니다. 책에 흔적을 남기는 대신 서평공책에 따로 발췌하거나 이동 중일 때는 수첩에 기록합니다. 오랫동안 소장하고 싶은 책은 표지를 비닐포장하기도 합니다.

 

모서리를 간혹 접을 때 있는데 그건 드문 경우고 가능한 훼손방지를 기울이는 편입니다. 방문객이 제 책을 허락없이 뽑아보는 것도 실례입니다. 모든 물건이 그렇 듯 책 역시 주인장의 양해를 얻어 책장에서 뽑아 읽기를 권합니다. 종이로 만든 책은 손상되기 쉽거든요.

 

가령, 빽빽하게 꽂힌 책을 집게 손가락으로 모서리를 강제로 당길 때 구겨지거나 실금이 가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책은 아이처럼 아끼라는 말이 있지만 저도 그렇게 조심성 많은 사람이 아니라 실수를 할 때가 있지요. 작가 장정일은 손님들이 담배를 피워서 책에 담배 냄새가 밸까봐 창문을 열어놓고 깨끗한 천으로 책을 닦기도 했답니다.  

 

또한 신간이나 구간을 구분지어 독서를 하지 않습니다. 탐서광이란 시대와 장르를 막론하고 ‘호기심이라는 갈고리’로 책을 끌어당기는 사람이 아닐는지요. 구입하는 책이 절대적으로 많을 때는 가계에 적잖은 부담이 됩니다. 카드 긁는 일은 충동적이고 쉬우니까요. 지금은 구입을 많이 자제하고 도서관 이용을 즐깁니다. 공공도서관은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합니다. 내가 낸 세금이 공공도서관을 운영하는 거죠. 희망도서를 신청하면 도서관에선 세금으로 도서구매를 합니다. 자기가 낸 세금을 정당하게 권리 행사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 어떤 책이 좋은 책이라 생각하시나요? 또 어떻게 읽어야 삶의 양식으로 쓸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읽고 나서 “야, 이 책 좋다.”, “이거 딱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 그런 책이 좋은 책 아닐까요? 읽는 도중에도 좋다는 느낌을 갖지만 읽은 후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는 책도 있습니다. 또 읽는 도중에 공감을 못했지만 나중에 다시 펼쳐보면 새롭게 다가오는 책도 있습니다. 위대한 거장들의 작품이라고 모두 진한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따라서 좋은 책이란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한 개의 촛불처럼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타오르는 책이 아닐까 합니다. 어디 가서 책 담론을 나눌 때 금방 떠오르는 책, 이야기를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책. 다시 들춰보면서 곱씹을 수 있는 그런 책이 자신에게 좋은 책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책은 사람과의 '말 걸기‘입니다. 책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나와 대화를 시도하는거죠. 저는 누구보다 자신과의 대화, 자신의 정체를 '나만의 울타리'에 갇아두지 않는것에 고민합니다. 물론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모두 성인군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글자에 천착하면 패착 하는 위험도 따르지요. 그래서 책을 읽고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의 의견에 수동적 태도로 따르지 말고 다시 자신의 의견으로 정리하는 일입니다. 질문과 사색을 통해 책은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현실이 되는 거죠. 정보, 다양한 의견, 그리고 사색이 책이 선사하는 보따리가 아닐까요.

 

- 작가님께 책이란 무엇인가요?

놀이기구입니다. 책은 글장난입니다. 장난은 갖고 논다는 의미로 놀이를 가리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놀이가 있지만 책처럼 고상하면서도 위험한 놀이기구는 없습니다. 책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마치 선과 악의 도플갱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위험을 감수하면서 글장난이라는 매혹에 기꺼이 빠졌습니다. 다양한 세상, 다양한 사람들, 다양한 글자꼴이 시끌벅적한 놀이가 책에 가득합니다. 그것도 한 번에 모두 만날 수 있는 놀이입니다.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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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326호-2012년 8월 20일 발행-는 자기계발 작가 이지성 비판 특집으로 엮었다. 처음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망설였다. 이지성 책을 읽은 적이 없고 관심 밖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지성은 자기계발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지난 7월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편집자들에게 "오타나 수정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 "내 글은 편집자 마음대로 토씨 하나 고칠 수 없다"는 발언을 했었다.

 

이 발언은 책 두 권을 내 놓은 나에게도 적잖이 황당했다. 물론, 편집자의 오타교정은 편집의 기본 중 기본이지만 편집자가 오타나 교정하는 사람은 아니다. 편집자는 책 만듦새 전반에 걸쳐 지휘하고 고심한다. 간혹 자질이 부족한 편집자도 있지만 3백만부 책을 판매하는 과정에 편집자의 역할이 컸으리라는 건 책을 내 본 사람은 안다. 따라서 편집자의 수고를 지근거리에서 확인한 저자 입에서 편집자 역할을 낮추는 듯한 발언은 나 역시 공감할 수 없었다. 그 뿐, 이지성은 내게 어필하지 않았다.

 

원고청탁을 수락한 이후 이지성의 트위터를 방문했고 독자들과 나눈 멘션을 지켜봤다. 성공한 작가의 권위와 외로움을 동시에 '느꼈다'. 공교롭게도 이지성의 책 두 권을 출판사로부터 받은 그 주 나는 원고마감이 무려 세 개나 밀려 있었다. 게다가 <저자와의 만남> 행사까지 겹쳤다. 마감일을 3일 미뤘다. 염천복중에 중노동을 각오했다. 서울 올라가는 기차안에서 <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을 읽었다. 이틀 후 내려 오는 길에 <2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를 읽었다. 

 

3일이나 미룬 마감일 오후에 원고를 다 썼다. 저녁을 먹고 나서 교정을 한 번 본 후 송고하려고 컴퓨터를 켰지만 작동이 되지 않았다. 고장이 났다. 부랴부랴 편집자에게 한 밤중에 전화를 걸어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했다. 다음 날 오전 수리센터로 갔다가 오후에 파일 손상없이 무사히 도착한 컴퓨터로 마감일을 두 번이나 어긴 늦은 송고를 했다. 편집자 속을 새까맣게 태우고 내 속도 재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이지성 비판 원고가 지면에 실렸다. 남을 비판하는 일은 마음이 편하지 않다. 그래서 비교적 '얌전한' 비판을 했다. 막상 <기획회의>를 받아보니 다른 필진들은 훨씬 예리한 비판을 가했다.

 

내가 이지성 작가를 비판한 이유는 간단하다. 베스트셀러 작가라면 그가 누구든 평가받는 출판풍토가 따를 때 출판계의 거품이 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양하고 알찬 포지셔닝이 출판계를 형성한다면 그 혜택은 독자에게 가장 먼저 돌아가리라.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의 필진이 이지성 비판에 참여했다. 아래글은 나의 기고문 전문이다.




 

<성공강박증에 갇힌 자기계발>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자기 계발서가 출간되었다. 심각한 취업난과 불안한 실물경제가 가속화된 때문이다. 복잡한 사회에서 대충 살다가는 경쟁의 낙오자가 될까봐 불안하다. 이처럼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미 성공한 방법을 ‘따라가고 싶은 기대심리’가 작동한다. 타인의 성공담을 빌려와 나의 성공담을 안전하게 건축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사회가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요동칠수록 자기 계발서는 풍년이다.

 

『2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와『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은 이지성의 자전적 경험담이다. 작가의 고생담은 성공의 길로 가는 방법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적중했다. 20대를 겨냥해서 쓴 책은 당연하지만 20대를 흔든다. 20대는 길이 안보이거나 제 길로 들어서지 못했다. 갈팡질팡, 혼돈, 그리고 불안한 세대다. 꿈을 실현하기에는 현실의 장벽이 높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미지의 세계는 두렵다. 심지어 아직 변변한 연장들, 이를테면 부와 명예와 인맥과 기술이 부족하다. 용기를 내어 도전을 했어도 멍이 들기 일쑤다.

 

이럴 때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방황하고 힘들었다고 고백하는 안내자가 등장한다. 게다가 그는 이미 자기 길을 찾는데 성공한 인물이다. 길을 찾는 방랑자는 망설일 이유 없이 그를 따른다. 이지성은 방황하고 두려운 청춘들에게 조언자로 나섰다. 이지성은 20대 청춘에게 꿈을 향해 ‘걷는 대신 달릴 것’을 요구한다. 20대의 생활방식이 30대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는 10년 후 자기 삶을 결정짓는 일종의 시간투자라고 볼 수 있다. 즉, 10년은 금방 지나가므로 천천히 걸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이지성은 꿈을 빨리 이루려면 시간을 아끼라고 반복 주문한다. 일단 시간표를 잘 짜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시간 관리는 긍정적 자기관리이기도 하다.

 

이지성의 시간 아끼기는 우선 수면시간 단축부터 시작한다. 3년 동안 하루 4시간 수면을 취하는 3(4)방법은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꿈을 향해 노력하는 시간을 늘린다면 능히 이루지 못할 꿈은 없어 보인다. 이지성은 수면시간 단축으로 성공한 지도자로 나폴레옹, 힐러리 클린턴, 빌 게이츠 등을 예시로 든다. 친구들과 놀고 여행을 다니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것은 이지성에게 있어 ‘20대의 부조리’라도 되는 것일까.

 

술을 마시고 친구들과 놀고 취미생활을 즐기는 짓은 이지성에게 있어 시간낭비다. 사회적 힘을 발휘하려면 자기 계발에 심혈을 기울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사회현실 비판은 쓸모없는 소모전인 셈이다. 비판의식 대신 너나 잘 사세요라고 말하는 이지성에게 있어 인터넷에서 시국비판을 하는 20대들은 어떻게 비춰질까. 설마 불평론자는 아닐까. 혼탁한 사회에서 공동체 문제를 지적하는 대신 입 닥치고 혼자 살 궁리를 한 결과 이지성은 작가의 꿈을 이뤘다. 20대를 하릴없이 놀았던 자신의 친구들은 현재 유명 작가가 된 이지성을 부러워한다고 전한다. 이지성의 논리대로 해석한다면 ‘20대는 30대의 성공재단에 바칠 불철주야 수고의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이지성의 옛 친구들은 이지성이 얻은 부와 명성을 부러워하는 것이지 이지성의 인간적 성숙과 행복은 아니다. 하물며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심금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적다는 이지성의 행복마저 부와 명성이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부와 명성만으론 완벽한 앙상블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 공동체에서 동떨어진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래서 내가 소속된 사회 문제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즉, 제도가 개인의 꿈과 성공에 공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20대는 자신의 삶을 실험하고 취향을 모색하고 세계를 탐색하는 시기다. 당연하지만 방황과 유희와 실패와 실수와 미흡함이 따른다. 이것저것, 여기저기. 건드려보고 헛발질을 하면서 경험이라는 매뉴얼 한 페이지를 만드는 것이 20대다. 아직은 일어서고 길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뜨거움과 힘이 있는. 그러나 이지성은 자신의 고생담을 펼치면서 20대의 매뉴얼을 인생 전체의 매뉴얼로 만들 것을 주문한다.

 

이지성이 이처럼 ‘20대 성공 훈련’에 집착하는 이유는 본인 개인사에 혐의가 짙다. 이지성은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교대를 갔다. 학교생활은 흥미를 잃었고 틀어박혀 글을 썼다. 친구들로부터는 이해받지 못했다. 쓴 글을 출판사에 보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을 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빚 갚기에 허덕였다. 부모님이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운 것이다. 빚을 갚느라 빈민가 월세 방에서 생활했다. 이러다보니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본인은 가난 때문에 버림 받았다고 말한다.

 

그래도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자기 계발 장르에서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유명해지자 이지성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이지성은 자신이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역경을 딛고 굴욕을 참으며 얻은 결과다. 이만하면 20대 청춘들의 멘토로서 손색없다.

 

스스로 자존감을 세운 이지성은 꿈을 찾는 20대들을 향해 성공한 사람을 찾아가서 성공담을 들으라고 권한다. 요컨대 멘토를 찾아 가르침을 받자는 것이 이지성의 ‘멘토 이데올로기’다. 이런 논리의 함정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실천방식을 따라하면 자신도 성공한 삶을 보장받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타자의 욕망을 복제하고 좇음으로써 나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성공이라는 욕망은 나의 욕망이지만 이지성이 누누이 강변하는 ‘멘토 모방’은 라캉의 욕망론을 상기시킨다. “어떤 대상을 욕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그 대상자의 내적 성질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욕망된다” 이지성이 지속적으로 강변하는 성공 추종은 본인의 살아온 이력에 기인한 욕망이다. 따라서 이지성에게 있어 성공이란 자기를 이기는 것뿐만이 아니라 성공한 타자를 좇고 남보다 앞서서 달리는 삶이다.

 

이지성은『20대, 자기계발에 미쳐라』와『스무 살, 절대 지지 않기를』에서 시종일관 주장한다. “남과 다른 삶”, “남들보다 앞으로 나아가기”, “꿈과 성공을 향해 곁눈질 하지 않고 달리기”. 이를 위해 이지성은 잠자는 시간을 줄여 독서를 하고 멘토를 만나고 자기 계발을 세우라고 조언한다. 이른바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생활을 통해 초석을 다지는 것이 ‘이지성식 20대 능률 시간표’ 패턴이다.

 

마치 공부 안하면 거지된다는 말처럼 자기 계발 안하면 거지된다는 것이 이지성의 자기 계발 논리다. 그런데 나는 문득 궁금하다. 그의 말처럼 경쟁사회에서 힘 있는 선두주자가 되려면 사회에 참여하고 비판하는 대신 자기 계발에 힘쓰면 과연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가 가능할까. 남을 밀쳐내고 앞선 삶 대신 남과 함께 놀면서 주변을 살피고 손을 잡는 삶이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이지성은 국가성쇠가 자기 계발 성패에 달렸다고 말한다. 이런 발언은 개인의 꿈과 성공을 국가의 존폐에 위임한 발상처럼 보인다. 개인의 꿈과 성공은 개인의 행복으로 그칠 때 의미가 있지 사회적 파급력을 지니게 되면 권력이 된다. 권력의 파행을 떠올릴 때 공동체 사회에서 개인의 막강한 성공이 누군가의 멘토가 되겠지만 반드시 선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열병에 휩쓸리는 사회는 어디선가 쓰러지고 짓밟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실패해도, 사는 데 큰 불편 없고 덜 불행한 사회가 행복한 사회는 아닐까.

 

 덧) 자기계발의 덫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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