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먹는 여우/기행/문화'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7.05.01 당나라에 간 고양이 (2)
  2. 2017.02.16 유홍준의 안목 (2)
  3. 2015.06.15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록
  4. 2015.04.27 공생의 디자인 (2)
  5. 2015.04.03 섬 택리지
  6. 2015.01.08 변경 지도
  7. 2014.12.08 침묵을 위한 시간
  8. 2013.12.03 바람과 햇빛이 순환하는 한옥
  9. 2013.10.03 노름마치를 찾아서
  10. 2010.11.21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 중앙유럽의 여행기

▲ 〈괵국부인유춘도(虢國夫人遊春圖) 

양귀비 셋째 언니 괵국부인이 봄나들이 가는 화려한 행차에서 인물을 고양이로 바꿔 묘사 ‘과지라(瓜幾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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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서기 618년 건국해서 907년 망하기까지 290년 동안 황제 20명이 통치했다. 알려진 바로는 당나라에서 풍습이 흥했던 이유로 농업 생산력 향상과 상업 발달을 꼽는다. 당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외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여러 종교와 문화를 흡수했다. 불교를 숭상했으나 아랍 문화까지 수용했다. 여기에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쓰면서 문화 지원을 아끼지 않은 무측천 [각주:1]시대와 예술에 취했던 현종[각주:2] 시대는 정치 평가와 별개로 문화 르네상스 시기였다.

 

중국 만화가 ‘과지라(瓜幾拉)’가 그린《당나라에 간 고양이》(원제 畵猫.夢唐), (조윤진 옮김. 달과소. 2017.1)에 따르면 당나라는 호국(胡國) [각주:3]문화를 적극 수용했다고 한다. 정치는 중화중심주의를 유지하면서 북방과 서역에 문호를 개방해 영토 복속에 따른 이민족의 반발심을 누그러뜨리고 세를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돌궐과 인도를 비롯해 페르시아와 아랍권까지 교류하면서 당 문화가 서역으로 확장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 당풍(唐風)의 탄생

호국문화는 당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상인과 외교관에 의해 당에 유입되어 널리 퍼졌다고 한다. 실크로드 상인들이 주도한 호국문화는 풍속에 영향을 끼쳐 복식, 음악, 미술, 음식, 장식 등이 성행했다. 수도 장안에 호국의 춤과 음악이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봐서 당나라 문화는 중국과 호국문화 이종 교배 결실인 셈이다. 화려한 문화 풍조에는 현종과 양귀비가 지원했고《당나라에 간 고양이》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현종과 양귀비를 등장시킨다.

 

주지하다시피 당나라는 다양한 문화가 꽃 핀 시대였다. 시와 글씨, 그림과 조각, 음악과 춤, 이야기와 풍속이 풍성했다. 시선(詩仙) 이백(李白), 시불(詩佛) 왕유(王維),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배출한 당대 시는 왕과 귀족부터 선비와 백성에 이르기까지 시를 즐겼으니 문일다(聞一多)[각주:4]가〈당시잡론〉에서 한 말처럼 ‘시당(詩唐)’[각주:5]이라는 호칭이 어울린다. 책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시가 유행한 배경에 도교를 가리킨다. 신선사상과 무위자연 사상을 결합해 안빈낙도와 자연 예찬을 기조로 삼은 당시(唐詩)와 풍속은 송(宋)나라 문예부흥과 함께 중국 역사에서 예술의 중심축으로 거론된다.

 

“도교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문인들은 사는 것이 낙(樂)이며, 선인(仙人)이 되는 것을 극락이라 여겼기에 속세를 초탈해 자유롭고 안락한 삶을 살며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린다. 그래서 문인들은 “글에는 도를 담아야 하며, 시에는 풍격(風格)[각주:6]을 담아야 한다.”고 외치며 연회와 소풍, 춤과 음악 등 각종 오락 활동에 열중했다.”

 

유독 당나라에서만 ‘풍격(風格)’이 강조된 것은 아니지만 노자의 후예로 자처한 문인들과 이원(梨園)[각주:7]을 세워 예인을 양성한 현종과 불교에 심취했던 무측천 시대만 보더라도 호방하고 화려하며 장식적인 기풍이 강한 당나라 풍격은 풍류(風流)로써 정착된다. 책에서 인용된 것처럼 소풍, 연회, 호선무[각주:8], 인형극, 격구, 바둑, 투호, 전기(傳奇)[각주:9], 동물기연[각주:10] 유행은 절기에 따른 세시풍속과 함께 오늘날까지 계승되면서 시대를 넘은 고유한 문화사조가 되었다.

 ▲ 호선무(胡旋舞)


■ 당나라 여성

이민족 융합 정책은 지배층이 결정하지만 민간에 가장 먼저 이식된다. 말하자면 아래로부터의 수혈인 셈인데 농·공·상업에 종사하면서 세태 흐름에 민감한 계층은 정치이해관계로 얽힌 지배층보다 취향선택에 비교적 자유로우므로 이민족 문화에 적극 반응한다. 저자는 여러 문화가 섞이며 당나라 여성은 다른 시대보다 자유로웠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단락 끝에 설명하겠다. 물론 놀이를 즐기며, 나아가 관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이전 시대와는 다른 당대 여성의 사회 지위에 변화가 있음이 짐작된다

 

《당나라에 간 고양이》에 따르면 말 타기에 능한 여성은 격구를 하거나 축국과 같은 격렬한 운동을 즐겼다고 한다. 황실여자축구팀까지 생긴 당나라에서 여성의 여가생활은 선택 폭이 넓어진 듯싶다. 물질적·정신적 안정은 취미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는 법인데 꽃놀이나 인형극 놀이, 연등회와 같은 나들이에서 말 타기나 바둑과 같은 직접 참여하는 취미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여기서 놓치지 않아야 할 지점은 새 풍속이 유입되었다고 해서 여성의 억압과 순종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으며 신분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 점이다.

 ▲ 천랑과 왕주의 사랑 이야기


책에서 인용한 소설〈이혼기(離魂記)〉에 나오는 여주인공 ‘천랑’처럼 예법과 도덕을 중시한 당대는 여성의 자유로운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여성에게 외국 문화를 허용했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폐지된 것은 아니다. 장자세습이나 힘의 서열, 또는 계급차등으로 유지된 가부장제는 권력을 잡거나 권력에 의탁하지 않는 이상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적용됐다. 중국 문학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왕의 총애를 잃은 궁녀들이 새나 반딧불을 키우며 외로움을 달래는 모습은 당대 문화 부흥에도 불구하고 왕을 정점으로 삼은 가부장 체제가 여성의 운명을 결정지은 반증이다.

 

이를테면 양귀비 자매들의 사치와 향락은 가부장제에 편입한 여성이 역으로 가부장제를 일신영달 수단으로 이용한 사례이다. 음력 3월 3일 세시풍속인 상사절에 양귀비 자매들은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물총새 깃 머리장식’에 ‘진주 박힌 허리띠’를 하고 호사스런 비단옷을 입고 ‘수정 쟁반에 담긴 흰 물고기’를 먹으며 진귀한 선물을 상납 받는 양귀비 자매들과는 다르게 궁궐 한쪽에서 벌어진 ‘눈물의 단체 상봉’[각주:11]은 무엇을 뜻하는가? 당나라 여성은 남장[각주:12]하는 풍습이 유행했고 무측천 같은 여성 황제가 나왔다. 여성이 군대에 참여하고[각주:13] ‘상관완아’[각주:14]와 같은 고위 여성 관리도 배출했다. 그러나 ‘쎈 언니’ 시대라고 해서 가부장제가 만든 불평등한 상황이 개선된 것은 아니다.


여성의 신체를 남성이 주관하는 사회에서 여성 장군과 여성 관리조차 힘으로 유지되는 가부장제인 왕조에 복무한 것에 다름 아니다. 양귀비와 같은 최고 권력조차 외려 가부장제 권력을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각주:15]로 역이용했으나 권력에 의탁해 의탁한 권력의 소멸과 운명을 같이 했던 것으로 보면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놀이란 굴레와 억압을 달래는 자기위안이 깃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속박의 고통을 놀이문화로 달랬던 당대 여성은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자유로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 민중의 삶

문화는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유행으로 그치거나 후대까지 계승되기도 한다. 자연환경에 인간의 생존이 절대적으로 지배받던 농경시대에 세시풍속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인간의 종족 보존 염원에 기인한다. 특정한 날을 기린 선대를 기억하며 안전하게 후대에게 물려주겠다는 의도였다. 세시풍속은 지역과 부족의 고유한 특성을 반영하며 정해지지만 정치 계산과 종속 관계에서도 작동한다. 오늘날 한국 절기 대부분이 중국에서 전해진 것을 감안하면 오랫동안 중국 영향권에 놓여있던 한반도의 지형학적·정치학적 조건을 떠올리게 된다. 청명절, 중양절, 곡우, 춘절, 단오절, 정월대보름, 칠석, 섣달 그믐날 수세와 같은 풍습은 한국 세시풍속과 겹친다.

 

당나라는 현종대의 부패가 패망의 길로 접어들기는 했으나 화려한 문화 이면에 만연한 부패가 퍼졌다고 봐야 한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시대였음에도 민중은 가혹한 공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당나라에 간 고양이》에서 세밀한 묘사로 눈길을 끈 귀뚜라미 싸움 그림은 당대 문화 현상을 잘 설명했다. 내기 돈을 건 귀뚜라미 싸움은 평민층에서 유행하다가 귀족놀이로 변했다고 한다. 궁녀나 귀족은 코끼리 어금니나 금으 만든 상자에 귀뚜라미를 넣어두고 싸움놀이를 즐겼다. 

 

귀뚜라미 싸움이 귀족놀이가 된 이유는 귀뚜라미를 공물로 제정하면 조달방식이 쉽기 때문이다. 백성이 잡아 바치고 귀족은 편하게 놀기만 하면 되는 발상이다. 귀뚜라미를 공물로 많이 바쳐서 논밭이나 누각을 하사 받기도 했다고 한다. 반면에 할당만큼 귀뚜라미를 잡지 못했거나 죽을 경우 엄벌에 처해질까 두려워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에서 귀족이 즐긴 놀이 대개는 이처럼 피지배층의 노동력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귀뚜라미가 공물로 납품되던 귀한 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매를 좋아했던 당 태종은 전문 사육기관까지 세워 새매를 관리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닭싸움과 말 춤, 사냥을 즐기던 지배층의 호사스런 취미는 문화융성과 민중착취라는 상반된 역사를 낳았다.

  귀뚜라미 싸움


《당나라에 간 고양이》는 당나라 문화사를 고양이 캐릭터로 그린 귀여운 그림책이다. 저자가 후기에 쓴 말처럼 진지하지는 않을지라도 많은 역사 자료가 부담스럽지 않는 분량으로 수록됐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남긴 것으로 평가받는 당나라 문화는 과정을 톺으면 민중의 고단한 삶이 가부장적 제도와 맞물렸다. 봉건왕조 체제에서 굴레를 안고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기이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현실의 부패와 억압과 불평등을 초현실적 이야기에 투영해 해소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단지 무서운 이야기가 아닌 현실세계의 시간과 공간, 즉 인간을 다룬 것이 당대 전기(傳奇) 소설이라는 지적은 일리가 있다.  




  1. 武則天. 624~705.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 [본문으로]
  2. 당나라의 제6대 황제(재위 712∼756) [본문으로]
  3. 중화사상에 젖어있던 중국이 북방과 서역 민족을 가리키는 말 [본문으로]
  4. 중국 현대 시인 (1899~1946) [본문으로]
  5. 시인 문일다는 <당시잡론>에서 "사람들은 보통 " '당시(唐詩)'라고 부르지만 나는 '시당(詩唐)', 시의 당나라' 라고 말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본문으로]
  6. 물질적, 정신적 참조물에서 보이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모나 모습 [본문으로]
  7. 좌부기 자제 삼백명을 뽑아 노래와 춤, 시와 악기를 교육시킨, 일종의 종합예술학교이다. [본문으로]
  8. 서역에서 들여온 춤으로 작은 원 안에서 바람개비처럼 날쌔게 도는 회전무. 당대에 가장 유행했던 춤. 처음에는 여성이 즐겼으나 나중에는 남성 무용수도 나왔다고 한다. '안녹산'의 난을 일으킨 안녹산도 호선무를 잘 춘 것으로 알려졌다. [본문으로]
  9. 기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로 한국의 '전설의 고향' 같은 장르이다. 귀신과 요괴, 용왕과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10. 당나라 때는 애완동물 키우기가 유행했는데 말과 귀뚜라미, 반딧불, 앵무새, 닭싸움에 낙타, 코끼리, 코뿔소, 타조를 귀족이 키웠고 사냥을 위해 치타와 스라소니도 키웠다고 한다. [본문으로]
  11. 상사절에 흥경궁 대동전 앞에서 궁녀들은 1년에 한번 고향부모를 초대해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먼길을 며칠씩 걸려 찾아온 부모를 만나는 일은 운이 좋아야 한다. 궁녀 숫자가 많고 부모 인원도 많았기에 인파에 밀려 목놓아 이름을 부르다가 날이 저물었다고 한다. [본문으로]
  12. 일반 가정집 여인부터 공주까지 남장을 하고 대중 앞에 나섰다고 한다. [본문으로]
  13. 황제 이연의 딸 '평양공주'는 아버지가 수나라를 공격할 때 사재를 털어 낭자군 7만여명을 모집해 직접 출전했다. [본문으로]
  14. 무측천이 가장 신임했던 조서 담당 여성 관리로 미모와 학식이 뛰어났다. [본문으로]
  15.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 : ‘소파’ ‘침상’라는 뜻의 영어로 할리우드 황금기에 많은 여배우들이 제작자에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제공함으로써 영화배우로 입문하였다는 풍문으로부터 연유한 용어 [본문으로]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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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액결제 현금화 2017.12.06 01: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

  2. bore 123 2019.06.10 17: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천에서 좋은글 읽어 보았습니다


▲ 1938년 간송 전형필이 세운 한국 최초 사립미술관 보화각(葆華閣)[각주:1] 개관 기념일에 맞춰

성북동 북단장(北壇莊)[각주:2]에 모인 미술 애호가들.

왼쪽부터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 사진출처 : 간송미술문화재단





‘안목(眼目)’은 한자로 ‘눈 안(眼)’자와 ‘눈 목(目)’자가 합쳐졌다. 무엇을 보고 판단하는 식견이 있다는 뜻인 ‘안목’에 ‘눈’이 강조된 이유는 그만큼 ‘제대로 가치를 본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답사 열풍을 일으켰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 청장은《안목》(유홍준 지음. 눌와. 2017년 1월)에서 안목을 이렇게 정의한다. “안목은 꼭 미를 보는 눈에만 국한하는 말이 아니고 세상을 보는 눈 모두에 해당한다. 그래도 안목의 본령은 역시 예술을 보는 눈이다.”

 

미술사가 입장에서 안목의 본령은 예술일 수밖에 없다. 평생 입신과 생계와 명예를 예술 자장 안에서 꾸렸으니 미술사가에게 안목이란, 예술을 통한 세상 읽기 프리즘일 것이다.《안목》에서도 저자는 시대와 인간이 원했고, 만들고, 사랑한 미술 작품을 휴머니즘 관점에서 차분하게 서술한다. 이론적인 해설보다 역사에서 어떤 안목이 어떤 작품을 세상으로 이끌어냈는가에 주목했다. 




■ 추사의 불계공졸(不計工拙)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각주:3]는 9년 동안 제주도 유배가 끝나자 이전과는 다른 서체를 썼다. 처음 보는 독특한 글씨를 두고 사람들이 괴이하다고 말했다. 소문을 들은 추사는 지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서체는 본시 일정한 법칙이 없고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怪)와 기(氣)가 섞여 나와서 이것이 요즘 글씨체(今體)인지 옛날 글씨체(古體)인지 나 역시 알지 못합니다.”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추사는 대정읍 위리안치[각주:4]를 겪으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서체를 쓰게 된다. 서체만 바뀐 게 아니라 성정도 달라졌다.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수재로 성장한 추사의 서체에 관한 우월감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에 나오는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에 얽힌 이야기처럼 대단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길에 들른 대흥사에서 대웅보전 편액을 떼어내고 자기가 쓴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떼어낸 글씨는 원교(円嶠) 이광사(李匡師)[각주:5]가 쓴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글씨가 낫다고 오만을 떨었던 것 같다. 9년이 지나고 추사는 해배 길에 대흥사에 다시 들른다. 이번에는 자기가 쓴 편액을 떼어내고 원교가 쓴 예전 편액을 도로 걸게 했다고 한다.

 

박규수[각주:6]는 추사 서체를 가리켜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평한다. 추사체는 조선왕조 통틀어 유일한 서체였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워 거부할 수 없는 서체로 받아들인 것 같다. 중국 명필 아류에 만족했던 서예가들에게는 추사체 등장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 문화 사대를 시대정신으로 삼은 당대에 추사체가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계산이 안 되는 건 자명하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앵포르멜[각주:7] 수준’에 이른 추사체가 중국의 고답에 빠졌던 조선 시대에 어떻게 환영 받을 수 있었겠나.

 

추사는 명나라 말기 서예가였던 동기창[각주:8] 서체를 배운 다음, 옹방강[각주:9]과 소식[각주:10]을 따라하고 구양순[각주:11] 등 역대 중국 명필을 익히고 공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글씨 흉내 내기였다. 저자는 제주도 귀양 이후 추사 서체는 일법(一法)을 이뤘다고 한다. 범인은 절망 앞에서 체념하거나 단념을 선택하지만 위인은 고통을 내적 연마의 시간으로 삼는다. 유배 고통이 추사를 수련의 길로 안내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박규수가 왜 추사의 연찬과 서체를 귀양과 함께 묶어 이해하라고 후대에 조언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두 번 말할 필요 없이 예술과 인생은 같이 간다.

 

■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조선 미술 특징은 소박함이다. 일례로 도자기에서 중국은 형태를 중시했고 일본은 색에 치중했으며 조선은 선이 아름다웠다고 한 야나기 무네요시[각주:12] 말처럼 조선 미술은 대중 친화적 느낌이 강하다. 우리나라 최고 불상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는 국보 24호 석굴암 본존불도 근엄한 가운데 인자함을 품고 있다. 불성과 인성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사례다. 한국인이 미술에서 드러낸 겸양은 건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음양 이치에 따라 풍수에 영향을 받았지만 높은 산에 낮은 집을 지어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다. 집을 지을 때조차 구도를 염두에 둔, 마음과 눈을 거스르지 않은 담담한 결과였다.

 

저자가 한국인의 미학으로 꼽은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이 말은 김부식이《삼국사기》의〈백제본기〉에서 백제 궁궐 건축을 언급하면서 쓴 말로 삼봉 정도전이《조선 경국전》에서 다시 인용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중국 궁궐이나 유럽 궁궐과 비교해 규모가 작고 장식이 적은 조선 궁궐에 갖는 열등감을 의식한 말로 자주 쓰이지만 저자는 궁궐 건축에만 한정해서 쓰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검박한 선비문화를 유교의 지침처럼 삼았던 조선시대에 문방사우로 상징되는 사랑방 가구는 ‘검이불루’였으며, 규방문화는 ‘화이불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 정신은 찾기 어려워졌고 대신 일본이 남기고 떠난 문화를 식민유산처럼 받았다. 궁궐 전각은 철거됐고 문화재는 사라졌다. 혼란한 시대의 조류를 타고 서양과 동양이 뒤섞이는 시점에 전쟁까지 겪었으므로 폐허 속에서 문화를 말할 여유 없이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음은 지난하다. 경제개발체제에 올인 해서 달리는 동안 모든 게 달라졌다. 검소함은 누추한 말과 같은 뜻이 되었고, 화려함은 부의 상징이었다. 철학적 의미로든 실천적 의미로든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경제동물이 된 오늘날 우리에게 소박하고 담백한 가치가 배부른 자의 요설로 둔갑한 것은 아닐까? 


■ 문화보국(文化保國)

‘문화란 정신’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누가 어디에서 쓴 글인지는 잊었다. 정신과 몸은 따로 있을 수 없으므로 만약에 문화가 정신이라는 말이 맞는다면 몸도 고달프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헬조선’이라는 말을 문화에 적용할 수 있는지 가늠해 봐야 한다. 물론 비정규직이 천만에 육박하고 실직자가 수백만에 달하며 노인빈곤, 인구절벽, 취준생, 3포세대와 같은 비참한 현실 앞에서 문화에 대한 회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책에서 다룬 일제강점기 미술애호가들을 읽노라면 고통스런 현실이라고 해서 문화를 저버리거나 하기 어렵다.이 문제는 왁달박달한 세속을 건너는 지팡이 같은 화두를 던진다. 적어도 이 책에서 다룬 엄혹한 시대에 미술품을 수집했던 자취를 보자면 ‘문화란 정신’이라는 말은 부족하다. 외려 ‘문화란 영혼’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각주:13]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 “문화보국”이라는 글씨를 썼다.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각주:14]아들로 태어나 서예가이자 천도교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33명이 모여 3·1운동 선언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후죽순 난립한 제헌의회에서 최고정무위원 28명 가운데 한 분이었다. 서화를 보는 안목이 탁월했고 고서화 수집도 수천점에 달했다고 한다. 


구한말 태어나 세기 전환기를 겪고 국권침탈을 목격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쳤으니 파란만장한 시대를 몸으로 살아냈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저자는 개화파에서 민족지도자로 변하고 다시 미술사에서 거목이 된 오세창을 일컬어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위창은 1928년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찬했다.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상·중·하로 나눈 조선까지 5편으로 구성”된 이 사전은 서화가들을 출생연도순으로 배열해 소개했다고 한다. 서예가 576명, 화가 392명, 서화가 149명 등 1,117명을 수록했고 관계 기록과 논평을 추가했다고 하니 웬만한 열의와 수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일제가 극심한 탄압과 문화재 반출을 완악하게 저지르는 상황에서 꿋꿋이 자기 의지를 실천한 셈이다. 책에 따르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근역서화징》을 가리켜 “찬연한 등탑(燈塔)”, “암흑한 운중(雲中)”이라고 했다고 전한다.《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근역(槿域)’은 ‘무궁화 땅’이라는 뜻이고, 이는 ‘우리나라’라는 의미로 붙였다고 저자는 밝힌다.

 

위창에게 ‘문화보국’은 나라를 잃은 서러움이 바탕에 깔린 철학이다. 저자가 꽤 여러 단락에서 설명한 ‘문화보국’은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발했다. 책에서 다룬 것처럼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 수정(水晶) 박병래(朴秉來),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과 같은 미술 애호가들의 지멸있는 실천은 문화재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 책에 따르면, 나라의 정신이자 위무이며 빛줄기였던 문화재를 지킨 이들은 일제 감시에도 불구하고 사들인 미술품을 품평하고 정보를 나눴다.

 

1922년경부터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경매를 열면서 일본으로 미술품이 합법적으로 넘어가고 심지어 ‘가이다시(買出)[각주:15]’가 판치는 시대에 높은 안목이 없으면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조선인 출신 미술품 애호가 등장은 우리 문화재 반출 막고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말한다. 오세창에서 전형필로 고유섭에서 최순우로 이어진 한국근현대미술사를 조망해보면 문화보국은 역사의 궤와 함께 결정될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되나니

저자는《안목》에서 미술사가로서 살아오면서 가장 뚜렷한 성과로《석농화원(石農畵苑)》을 번역해서 출간한 일이라고 고백한다. 정조 때 의관 석농 김광국이 수집한 그림을 엮어 화첩으로 만들었는데 제발과 화평을 곁들여 모두 10권으로 출간했다. 책에 따르면 수록된 작품은 267점이고 화가는 공민왕부터 안견과 김홍도에 이르기까지 101명에 달한다고 한다. “조선 400년 동안 화가를 총망라한 ‘조선시대 회화사 도록’”인《석농화원》은 2015년 유홍준 교수에 의해 영인본으로 재출간되었다.

 

《석농화원》은 높은 경매가격에 못지않게 유한준(兪漢雋)이 쓴 발문은 책 이름보다 더 유명세를 떨쳤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 때 보이는 건, 전과 다르다”고 한《나의 문화유산답사기》명문장은 사실《저암집(著庵集)》에 나오는 말로 유한준은《석농화원》출간 의도와 주제, 엮은이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했다.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나니 그때 수장한 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높은 안목을 지닌 미술애호가들이 고려청자와 달 항아리와 연적과 고서화를 모으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서양화를 공부하는 작가들이 나왔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고려인으로 살면서 북한 미술계를 지도했던 변월룡은 이념을 떠나 일제강점기 때 고국을 떠난 이주민 후손이라는 점에서 예술과 역사의 궤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운명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상흔을 피할 수 없어 마흔 한 살에 요절한 이중섭이나 살아서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박수근도 예외는 아니다.

 

군부독재 시대에 옥고를 치루며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던 신영복은 흡사 추사 김정희를 떠올리게 한다.《안목》말미에 다룬 현대 작가들조차 현대사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연에 천착하다보면 이 땅의 굴곡진 역사가 더욱 도드라진다. 1980년대 지독했던 독재항거에 맞서 판화를 제작했던 오윤은 전설의 이름이다. 굵은 근육을 거칠게 표현하며 저항을 드러냈던 오윤의 판화가 걸개그림에 걸려 시위 군중 속에서 힘차게 펄럭였었다. 팔팔한 리얼리티를 주저 없이 드러낸 현대미술은 이종구로 하여금 농촌을 직시하게 하고, 황재형에게 탄광촌의 검은 풍경을 자아냈다. 이발소에 걸림직한 그림으로 대중친화에 다가섰던 민정기는 고지도 같은 산수화로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를 새로 짰다.

 

현실참여 모드가 민중미술로 거듭 나면서 현장성 중시에 대중은 눈길을 던졌다. 저자는 사실주의 경향이 강한 작가들은 당대에서 대상을 재현하려는 자세를 견지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당대 현실을 반영하고 나은 사회를 염원하는 역할을 맡고 싶어 한다고 한다. 박근혜 정권에서 탄생한 여러 풍자화도 현실참여 의식에서 나왔다.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처럼 현상을 버리고 추상표현에 골몰한 화가도 궁극적으로는 ‘지금, 여기’의 공간을 물어본 것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념으로 1년 동안 신문에 연재한 기고문을 엮은《안목》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각주:16]에 인생론을 겹친 책이다. 남태응[각주:17]이 쓴《청죽화사(聽竹畵史)》[각주:18]처럼 “인간상 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까지 짚은 평” 이라고 할만하다. 긴 서평을 마치면서 우리에게 왜 안목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당연지언이다.


“당대에 안목 높은 이가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버린다. 많은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 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1. 1938년 간송 전형필이 성북동에 세운 사립미술관으로 현재 '간송미술관'전신이다. [본문으로]
  2. 간송 전형필 사저.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단장'이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3.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학자이자 서예가. [본문으로]
  4. 위리안치 (圍籬安置)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본문으로]
  5. (1705년 ~ 1777년). 양명학자이자 서예가. 나주 벽서 사건에 연좌되어 회령, 진도 등에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본문으로]
  6. 1807(순조 7)∼1877(고종 14). 조선 말기의 문신. 실학자·개화론자. [본문으로]
  7. Informel .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운동. 선묘(線描)의 오토메티즘, 산란한 기호, 그림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석회를 쳐바르는 기법 등을 구사, 구상 ·비구상을 초월하여 모든 정형을 부정. [본문으로]
  8. 董其昌. 1555(명 가청 34)년 ~ 1636. 11. 11. (승정 9년).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 화가. [본문으로]
  9. 翁方綱. 1733(청 옹정 11)년 ~ 1818(가경 23)년. 중국 청대 중기의 금석문학자, 서예가. [본문으로]
  10. 蘇軾. 1037년 ~ 1101년자가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사천(四川) 미산(眉山) 사람으로, 아버지 순(洵), 아우 철(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불리우며, 모두 당·송 8대가에 속했다. 소식은 시, 사, 문, 음악, 서법 등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정치에도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21세 때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북송 때의 격렬한 변법운동(變法運動) 및 신구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몇 차례 좌천당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불운을 겪었다.. [본문으로]
  11. 歐陽詢. 557 ~ 641. 중국 당(唐)나라 초의 서예가.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했다. [본문으로]
  12. 柳宗悦.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 일본의 민예연구가·미술평론가. 미술사와 공예연구 및 민예연구가로 활약하면서 도쿄에 민예관을 설립하여 공예지도에 힘을 쏟았다. [본문으로]
  13. 음력 1864년 7월 15일 - 1953년 4월 16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한말의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한성순보》 기자를 지냈고 우정국 통신원국장등을 역임했다. 만세보사, 대한민보사 사장을 지냈고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본문으로]
  14. 1831년~1879년. 역관출신으로 추사 김정희 등 많은 문인과 교류하였으며 미술에 관한 안목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본문으로]
  15. 일제강점기 골동품 장사꾼들이 돌아다니며 헐값에 미술품 사거나 왜사기를 갖고 가서 바꿔 일본 상인들에게 되팔음. [본문으로]
  16. 책 만권 읽고 천리를 여행하면서 문인다운 자질을 길러 작품 속에 절로 배어 나오게 하라는 것. 19세기 전반 조선 시대 양식 됨. [본문으로]
  17. 南泰膺. 1687년 ~ 1740년. 1687(숙종 13)∼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인. [본문으로]
  18. 《청죽만록聽竹漫錄》의 별책에 실려 있는 화평으로 조선 미술에 대한 신랄하면서 정직한 평론집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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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붉은산 2017.02.17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창 살기 어려운 시절에 사재 털어서 문화재지킨 분들이 있는가하면 장택상처럼 정치자금 장만 수단으로 삼은 인간들도 잇죠. 이거 어려운 책인것 같아 저는 패스하려고요. 안목이 넘나 안됩니다. ㅠㅠ

    • 윤미화 2017.02.17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그래도 이 책에서 장택상을 일컬어 아쉬운 미술애호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미술이나 고전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 경북 청송, 1998 (사진 최수연)


                  

                                                                     

단 한 사람만 빼놓고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사람은 카메라를 눈에 갖다댄 채 침착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하다.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수동적인 방관자인데 반해, 이 사람은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좀더 적극적인 사람, 즉 남을 엿보는 사람이 된다.-《사진에 관하여》, 수전 손택





농민신문사에서 20여년 가까이 사진을 찍는 최수연이 낸《유랑》최수연 지음. 여행하는나무, 2015. 6 은 사라지는 풍경을 흑백 사진에 담았다. 전작《소-땅과 사람을 이어주던 생명》최수연 지음. 그물코. 2011. 10  이은 ‘사라지는 것들에 관한’ 사진책이다. 


내가 ‘사라지는 풍경’이라고 퇴락을 암시하는 표현을 쓴 이유는 최수연 사진 대개가 시골 언저리를 배회하기 때문이다. 생산성과 이익창출, 효율성이라는 경제 논리에서 밀쳐져 개발 대상으로 낙인 찍혀 원초를 잃어가는 장소 말이다. 책 제목에서 처럼 저자가 ‘유랑’을 선택한 이유는 특정 지역에 머물지 않고 방방곡곡 다닌 근거에 있다. “시간에 매여 부자유한 일정이지만 자유롭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카메라 메고 돌아다녔다. 스스로 시간을 기록하는 유랑자라 생각하고 셔터를 눌렀다.” 


제주도, 가파도, 서울, 의성, 서산, 태백, 청산도, 순천, 하동, 진천, 단양, 청송, 광양, 김제, 거창, 하의도, 보성, 태안, 구례, 남해, 임실, 화순, 함평, 영주, 보은, 거문도, 경기도 광주…… 최수연 카메라는 눅눅한 땅과 마른 땅을 담고 깊은 바다와 맑은 강물을 담았다. 가파도 하늘은 금방 빗방울이 후드득 내릴 것처럼 짙은 먹물이 가득하다. 강원도 인제 산길에는 진달래가 몸을 활짝 열었다. 분홍 꽃잎은 사진 속에서 흑백으로 농담濃淡 을 달리한다.


동백과 유채가 흐드러진 뒷동산에서 아이들은 나무줄기를 타고 논다. 겨울 잠바를 입은 것으로 보아 아직 날씨가 쌀쌀할 것이다. 아이들은 이쪽을 보고 웃는다. 흑백은 왁달박달 난장법석을 정제하는 색이다. 어지러움을 빼버리고 주제에 몰입하는 오롯한 힘이 있다. 긴 사설 없이도 설득력을 얻는다. 흑백은 그 존재의 밑절미를 정직하게 대면하도록 안내하는 바, 새로운 재구성 대신 대상을 정체하고 정체한 지점에 기억을 피워내기도 한다.


그래서 흑백 사진에 나오는 인물은 어떤 한 시점, 한 장소를 상징하는 가장 강력한 아우라이다.《유랑》은 시골에서 만난 인물들을 집중 조명한다. 취재를 이유로 떠난 출장에서 최수연이 만난 시골 사람들은 ‘사라짐’과 ‘흑백 사진’에 맞춰 풍경의 삼원구도를 완성한다.


수레에 짐을 실은 노인이 신작로를 걸어간다. 하늘은 먹구름이 짙다. 곧 비가 오려나보다. 걸음을 재촉하지만 굽은 허리 아래 펼쳐진 길은 아득하다. 이번에는 쭉 뻗은 농로를 지팡이를 짚고 가는 노인이 있다. 흰 개 한 마리가 뒤를 따른다. 막힘없이 당당하게 서 있는 전봇대는 일렬로 사열한다. 노인을 사열하는 것 같지만 길을 사열하는 것처럼 보인다. 직선끼리 결탁했다. 살아온 길이 이만큼인데 가야할 길이 저만큼 어질어질하다.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노인이다. 구부정하게 등이 굽은 노인은 푸성귀를 가득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뒷짐을 지고 걷는다. 저녁 찬거리일지도 모른다.


노인과 뒷모습은 인생의 저녁을 맞이한 사람을 완벽하게 묘사한다. 곧 어둠이 밀려와 그림자를 지울 것이다. 그래도 뭔가 아쉽다. 그래서 노인은 한 번 더 돌아본다. 2011년 충북 영동에서 만난 노인은 아직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 돌아보는 눈동자에 힘이 없다.


《유랑》에서 나오는 ‘노인의 뒷모습’은 다음 책장을 넘기다가 다시 돌아보게 한다. 돌아본다는 것은 다시 본다는 것이다. 스치듯 흘려보낸 자취를 일상의 관계성으로 취하려는 의지다. 난로를 가운데 두고 모인 시골 버스 대합실에서 노인들은 두고 온 이력을 생각할 것이다. 각자 다른 생각에 골몰하는 표정은 내 존재의 공백을 메우는데 여념이 없다.


인간은 자신의 현재가 언제든 일거에 붕괴되거나 사라질 수 있음을 망각하므로 행복을 느끼는 것인지 모른다. 행복이라는 추상성이 실재성으로 거듭 나려면 현실을 견뎌야 한다. 상처자국을 건사하고 과거의 파편이 더 이상 현실로 침탈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해결과 치유를 찾아 유랑하는 것이다. 놀이에 빠진 노인들이 있다. 마을 어귀에 모여 수다를 떨고 바닷가 둑방에 모여 술을 마신다.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생선살 몇 점이 함초롬하다. 인생의 도락을 알려주는 맛일게다. 마을회관에 모여 민화투를 치고, 면민체육대회에 모여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춘다. 얼콰해진 노인들은 징과 북을 치며 음주가무로 노니는 뒷모습을 마감하고 싶은 것이다. 사진은 그 장면을 영구히 보존한다.


수전 손택은《사진에 관하여》수전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이후. 2005. 2 에서 사진의 힘은 ‘한 순간’을 기록하는데 있다고 말한다.


“사진의 힘은 우리로 하여금〔사진에 포착된〕어떤 한 순간, 그것도 시간의 정상적 흐름이 곧 제자리에 돌려놓을 순간을 마음껏 검토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은 시간의 고정(사진이 만들어 놓은 무례하고도 신랄한 정체 상태)은 새롭고도 훨씬 포괄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창출해 왔다.”


물론 손택이 정의하는 사진은 정지된 한 순간은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하지만 결국 사진은 무엇인가를 이해하게끔 도와줌에도 불구하고 보는 세계를 취득 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불평한다. 인간이 인간을 설명하는 최고의 도구이지만 사진은 ‘과거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현재 찍는 사진조차 과거의 사진이 됨은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진은 시간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결정적 순간을 획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적절한 순간이라고 해서 다 진실하거나 과학적이거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사진은 은폐와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사진 리얼리즘을 말하는 게 아니다. ‘한 순간’은 브레송의 말처럼 “질서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이 지목한 질서는 손택이 말한 아름다움이나(아름다움은 변한다) 완벽함이 아니라 피사체를 미화한 ‘에토스 ethos’ 로 사진은 보는 자에게 신뢰를 얻는다. 사진은 불변하기 때문이다. 가끔 거짓 사진으로 빚은 부주의조차 사진은 관계를 맺은 대상에게 적당한 진실을 부여하며 마법처럼 믿는 것이다.


최수연은 진실과 마법 사이를 고민하지 않는 듯하다. 너무나 정직해서 참신하지 않다. 이미지에 현혹하는 대신 접근성을 높였다. 인생의 재상災祥 과 화복禍福 을 견디면서 마침내 갈 길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에게 마지막 예의를 갖춘 듯 담담하게 기록하며 필시 복숭아빛 뺨을 가졌을 아이들의 웃음은 미래를 허황된 호의로 덧칠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수연 사진은 묘사가 아니라 복제에 가깝다. 흔하고 익숙하다. 낳고 살다가 떠낢을 이질적 공간으로 만들지 않았지만 흑백이 주는 맥락 때문에 날것을 포착했음에도 아스라하다. 흑백의 밑질김은 흙처럼 무겁고 먼지처럼 가벼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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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레산스이(枯山水)’ 양식을 띤 교토 료안지 정원


한국 정원은 선비가 만들고 일본 정원은 선승이 만든다. 조동종 승려이자 다마미술대학 환경디자인학과 교수 마스노 슌묘가 쓴《공생의 디자인》정영선 감수, 이규원 옮김. 안그라픽스. 2015. 2 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정원을 가꾸는 승려를 ‘석립승石立僧’ 이라고 부른다. 일본 선 정원을 이해하려면 호칭에서 ‘돌석’과 ‘설립’자가 쓰였음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뜰 앞의 돌


책에 따르면 일본에서 정원 가꾸기 3대 요소는 돌, 물, 나무이며 돌이 중심이라고 한다. 돌은 “나는 누구인가?”를 사유하게 하는 선종禪宗 상징이라는 것이다. 나를 탐구하는 선불교 교리에 따라 돌은 묵직한 화두였던 셈이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자문할 때 가장 좋은 환경은 둘레가 조용하고 정신을 집중할 수 있도록 단순한 조건이어야 한다. 돌 정원을 거닐며 상념을 정리하고 무념에 빠질 수 있는 건 돌이 지닌 절대고요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돌 정원을 가리켜 “가장 고요하고 편안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굵은 모래와 바위만으로 산과 강, 풍경을 표현한 ‘데쓰센소키鐵船宗熙’, 즉 ‘마른 산수’로 불리는 ‘가레산스이枯山水’ 양식은 침묵과 고요 가운데 치열한 내면수행을 상징하며 일본 정원의 대표 양식이 되었다. 교토 료안지龍安寺는 임제종 소속 절집으로 모래와 돌만으로 이룬 정원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외교관을 역임했던 작가 자크 브누아 메샹이 쓴《정원의 역사》이봉재 옮김. 조경진 감수. 르네상스. 2005.10 에서 서양인이 본 가레산스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입석이 불러일으키는 감명은 마치 조상을 숭상하는 마음과도 닮아 있다. 거기에 ‘있는’ 것만 보고 있으면 거기에 ‘나타난’ 것은 이상하게도 유달리 그 존재 의미가 엷어져 간다. 그렇다. 이 돌들은 하나의 가르침으로, 혹은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겉모습만으로는 돌이 우리에게 던지는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이 다시 탐색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선 정원 개념은 ‘산천초목 실개성불山川草木 悉皆成佛’로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자연 모두에 마음이 있으며 그것이 곧 불성佛性 임을 주지하라는 뜻이다. 대지가 지닌 불성을 보는 게 선 정원이며 “대우주의 진리를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한다고 한다. 불교에서 진리란 “변하지 않는 불성”을 가리킨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변하지 않고 꿈쩍하지 않는 돌을 정원 중심에 놓고 ‘선 정원’으로 부른다.


돌은 오래 묵어도 변하지 않으므로 진실 또는 불성을 상징합니다. 선에서는 어떤 대상에서 다양한 구성 요소를 다 떼어내고 깎아낸 끝에 드러나는 미를 중시하는데, 이를 ‘간소의 아름다움’이라 합니다. 더는 떼어낼 것이 없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정원에 남는 것은 돌과 흰 모래뿐입니다. 돌만으로 구성된 정원은 눈속임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고교시절 스승에게 돌 배치를 배우며 균형과 조합을 배우기 시작한 저자는 딱딱하지만 정직한 정원이라는 생각에 돌 정원에 매진한다. 그래서 저자가 디자인한 정원은 돌이 빠지지 않고 돌이 주제이다. 앞과 뒤,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 모양을 살피는 일을 두고 저자는 돌의 마음을 읽는다고 말한다. ‘석심石心’을 염두에 두면 돌 품격을 따져 정원 배치를 하는데 쉽다는 것이다. 세심하게 고른 돌을 줄에 매달아 옮길 때 고수는 돌이 놓일 자리를 이미 무의식적으로 꿰뚫는다고 한다. 둘레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자리에 돌을 놓아야 자연에 마음이 있다는 그 마음이 불성이며 불성이 진리라는 선불교 이치에 맞다. 그래서 저자는 석등石燈 한 개조차 석등을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두루 어울리게 놓는다고 한다.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 것. 우리 정원에서는 세부를 구성하는 하나하나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소會所, 선 정원을 잉태하다


선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선 정원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책에 따르면 예술을 좋아하던 승려들이 ‘회소’에 모여 담론을 나눴다. 서양 살롱salon과 같다. 한문학에 능통한 오산승五山僧, 정원을 만드는 석립승石立僧, 서예를 하는 묵적승墨積僧, 그림을 그리는 화승畵僧이 참가했다. 방장이 묵는 절집 마당에 큰 얼개만 갖춘 정원을 만들어 기한을 정하고 느낌을 그림과 시로 표현해 두루마리 시화축詩畵軸 으로 만들었다. 정원이 완성되면 다시 모여 만들어진 정원을 보며 다음 표현으로 이어 나갔다.


그래서 저자는 선 정원은 종교가 만든 예술이라고 단언한다. “종교를 추구하다가 자신이 터득한 것, 뭔가 붙잡았다는 느낌, 또는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발로였다는 점이다. 저자는 “종교의 끝에는 예술이 있다”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서양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글라스를 예시로 든다. 기독교 대표 예술 양식으로 꼽히는 프레스코화와 스테인드글라스는 신을 향한 숭고한 마음과 기도가 만들어낸 예술이라는 것이다. 신이 거처하는 세상을 상상하고 가보고 싶은 열망으로 서양 예술이 나온 셈이다.


말하자면 세속 예술이 자아실현이라면 종교 예술은 진리를 향한 간절한 기원이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신앙심으로 만든 종교 예술은 세속 예술과 달리 유행과 이해타산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초월한 분위기를 지녔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 선 정원이 종교를 배경으로 탄생한 점은 예술을 종교로 승화시킨 게 아니라 종교를 예술로 재현했다고 볼 수 있다.


무사를 가르친 선승


선승들이 회소에 모여 활발한 문화를 나누자 무사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때는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1467년 ‘오닌의 난’ 이후 일본은 대전투 폭풍이 불었다. 농민은 가혹한 부역으로 영주에게 대항했고 무사는 권력에 도전했다. 쇼군은 잦은 하극상으로 교체가 빈번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칼을 겨누고 형제끼리 죽였으며 친구를 배신했다. 피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살길이 보이지 않았다. 두렵고 절망했다. 그래서 뜻있는 무사는 선승을 찾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물었다. 물론 처세술을 간파한 인물은 일신영달을 꾀했다. 화승총을 사용해 일본 최고 무사 집안이었던 다케다 가문을 물리치고 중서부를 장악한 ‘오다 노부나가’와 같은 간웅도 있다. 탁류에 빠졌을 때 거슬러 오르기보다 물줄기를 타고 출세를 꾀한 영악한 인물이다.


대개 무사들이 이해득실을 따져 사람을 죽이는 일에 나선 반면 살인에 회의를 품은 무사는 회소에 참가해 고아한 예술을 공부했다. 저자는 회소에 나오는 무사들은 선 예술을 받아들여 가치관과 생활방식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가람과 복도로 연결된 쇼인書院 양식의 집을 짓고 무차별 살상을 점차 금하기 시작했다.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는 역대 쇼군들이 선승에게 가르침을 청했다고 하므로 선승은 점차 쇼군의 정신적 스승 역할을 맡는다. 말하자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선불교가 칼을 찬 사람들에게 칼을 휘두르지 않고도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그림자, 붙잡아 둘 수 없는 찰나의 아름다움


“붙잡아둘 수 없는 찰나의 아름다움” 때문에 일본에서는 그림자를 중시했다고 한다.


수면에 비친 달은 손으로 건져 올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두 손으로 떠올린 물에 달을 비춰볼 수는 있어도 달을 꺼내어 쥐어볼 수는 없습니다. 달은 진실을 은유합니다. 그래서 달은 ‘깨달음’을, 구름은 깨달음을 가리는 ‘집착’ ‘자아’ ‘망상’ 등을 비유하는 선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수면에 비친 달, 바람과 함께 움직이는 나무 그림자는 시간과 함께 변해가므로 그 아름다움은 그 순간순간에만 있습니다. 도려내고 싶을 만큼 아름답지만 손에 쥐어볼 수도 없고 붙잡아둘 수도 없습니다.


“도려내고 싶을 만큼 아름답지만” 달그림자, 나무 그림자, 꽃 그림자는 인간이 어찌 해 볼 수 없는 경지이다. 쥐면 부서질까 불면 날아갈까 애틋함조차 허용하지 않는 경계 너머 경계 자취가 그림자이다. 이런 이유로 선 정원에서는 빛이 땅에 닿는 각도를 계산해서 물이 있는 정원을 만들고 돌 정원 가까이 꽃그늘이 지도록 꽃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가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자아를 탐구하고 감정을 절제했던 모양이다. “실물이 아닌 그림자에서 아름다움을 본” 선 정원은 정적과 안식을 전한다.


이처럼 대상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윽한 품성을 ‘유현幽玄’ 이라고 한다. 여기서 ‘검을 현’은 그림자가 어떻게 그윽한 자태가 되는지를 한 큐로 설명한다. ‘검을 현’은 검다, 멀다는 뜻과 함께 하늘빛, 그윽하다는 뜻이 있다. ‘검다’를 ‘그윽하다’와 연결하면 선 정원은 “속 깊이 감춘 여운”을 살린 정원이자 “도려내고 싶지만 붙잡아 둘 수 없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살린 정원이다.


‘유현’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다 드러내지 않고 웅숭깊이 감춘 모습을 그대로 지킴으로써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게 선 정원이라고 말한다. 절제와 정제는 침묵에서 발화하는 법이다. ‘유현’을 읽으면서 건축가 승효상이 《건축, 사유의 기호》승효상 지음. 돌베개. 2004.8 에서 ‘성서적 풍경Biblical Landscape’ 이라고 부른 스톡홀름 우드랜드Woodland 공동묘지가 떠올랐다. 융단처럼 부드러운 녹색 구릉 위에 투박한 나무 십자가를 세운 우드랜드는 무성영화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영면해 있다.


가르보는 말수가 적은 여배우였다. 서른여섯 살에 은막에서 은퇴하여 은둔하다 여든다섯 살이 된 1990년 4월 15일 고요한 봄밤 꽃잎과 함께 졌다.《건축, 사유의 기호》에 따르면 가르보는 우드랜드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 우드랜드는 ‘침묵의 건축가’ 시구르트 레베렌츠가 설계했다. 레베렌츠는 아흔 살에 죽기까지 글 한 줄 남기지 않고 강의조차 안 하고 오직 건축 현장에서 일하다 죽었다고 한다. 가르보나 레벤렌츠는 조용한 사람들이었다.


조용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설계한 우드랜드는 언덕 위에 나무를 심어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이미지를 만들었다. 입구에서 1킬로미터를 일직선으로 걸어 닿는 곳에 나무 십자가가 긴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다. 절제, 침묵, 경건, 존엄, 안식과 같은 낱말이 저절로 스미는 풍경이다.


우드랜드는 공동묘지이지만 좀 더 섬세하게 말하면 ‘안식 정원’이다. 기독교가 사상의 기저를 이룬 서양임에도 불구하고 우드랜드가 동양을 연상하는 수묵화 풍경을 가진 이유는 단순성과 그림자를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마스노 슌묘가 선 정원을 수묵화에 비유하며 “감춤은 보는 이의 역량을 묻는 것이다”고 말한 맥락과 통한다. 숨겨진 부분을 보고 싶은 상상이 ‘유현’의 의도이자 ‘선 정원’의 지향점이라는 것이다. 돌 정원은 무념무상을 한 점 한 점 그리는 ‘정적의 정원’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적을 “안으로 향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정원에 긴장감을 조성해 중요한 내용을 형상 없이 만든 공간이 여백이다. 


여백은 스스로 진리를 묻다가 여운을 남기며 생각이 없는 지점을 지향한다. 그림자와 수묵화는 먹색 단색이다. “현실의 색을 부정함으로써 보는 이에게 다양한 색을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림자는 아무 말 없이 보여주면서 많은 말을 한다.


간소, 고고, 탈속, 정숙한 선 정원


저자가 말한 선 이란 “자기 내부에 있는 진리와 도리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몸으로 체득하는 수행修行” 이다. 실천이 따른다는 점에서 선과 철학은 다르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정원 가꾸기가 수행의 기본이며 깨달음의 길이라고 한다.


저에게 정원은 손님을 맞는 마음을 표현하는 곳이자 수행을 거듭해온 저 자신을 표현하는 곳입니다. 정원을 만드는 제 마음이 정갈하지 않으면, 정신성이 높은 정원을 만들 수 없습니다. 정원은 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자 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원의 주제인 정옥일여庭屋一如 는 건물과 정원을 주종관계로 보지 않는다. 건물도 정원의 구성 요소 가운데 하나이며 정원을 그림 같은 자연스런 경치로 들어오도록 만드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 이처럼 정원을 내부로 끌어들인 시각작업을 조성해서 실내에서 정원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실내에서 볼 때 일본 정원이 액자처럼 보이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단순하고 간결한 함축을 정원에 배치하면서 극도로 절제한 선 정원은 단순함이 진리라는 불교 사상을 그대로 이식했다.


선 정원의 간소함과 절제, 고고함과 정숙한 지향성은 둘레와 어울리는 공생共生 정신에 기인했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석등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 스미는 자연스러움이다. 물론 처음부터 일본 정원 양식이 선 정원을 변절하지 않고 계승한 것은 아니다. 자크 브누아 메샹은《정원의 역사》에서 일본 정원은 단순하게 시작해 화려하게 진행되고 다시 간소하게 압축되었다고 말한다. 


15세기에 이름을 떨친 조원가造園家 소아미相阿彌 는 일본 정원은 열두 가지가 있고 각각 스물여덟 가지 조성법이 있다고 했다. 이런 까닭에 정원은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희열과 쾌락의 장으로 탈바꿈한 정원은 자기 수양 공간이던 정원의 본질을 퇴색시켰다.


그래서 정원 자체에 집중하고 내면을 탐구하는 장소로 회귀하는 바람이 일었다. 소아미는 정원의 열두 가지 양식을 반으로 줄이고 나머지도 목적에 따라 확 줄였다고 한다. 모든 정원은 목적에 맞게 조성되어야 하며 정원 한 곳에 정신 한 가지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아미가 만든 정원 양식은 간소하며 우아한 정원을 지향했다. 마스노 슌묘가 지향한 선 정원과 같다.


마스노 슌묘는《공생의 디자인》에서 단아한 문체로 선 정원의 배경부터 조성 양식과 의미를 톺았다. 오늘날 유리와 콘크리트, 금속으로 지은 건축물이 자연과 대치된다고 완고하게 훈계하는 대신 화강암을 접목해 부드럽고 생동감 있는 건축물이 되기를 염원한다. 정원을 이루는 나무, 돌, 물, 꽃, 바람의 마음을 읽어 표정을 살피고 제 자리에 알맞게 놓을 때 서로 거스르거나 적대하지 않고 어울린다는 것이다.


나무 성질을 아는 일을 “목심木心을 읽는다”고 하고 돌 성질을 아는 일을 “석심石心을 읽는다”고 한다. 가지가 휜 나무, 숲에서 자란 나무, 시냇가에서 자란 나무, 뿌리가 넓게 퍼진 나무, 잎이 두껍거나 얇거나 작거나 큰 나무, 봄과 여름보다 겨울에 보기 좋은 나무 등 생태에 맞춰 정원을 만든다. 돌도 마찬가지다. 숲에서 가져온 돌, 채석장에서 기계로 다듬은 돌, 집과 가까운 곳에 있던 돌, 앞과 뒤,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이 저마다 다른 표정이다.


운동감을 만드는 물도 저마다 놓이는 자리에 따라 변한다. 여울물과 급류가 다르고 흘려보내는 물과 고인 물은 어떤 정신을 가진 정원을 꾸미는가에 따라 적용방식이 다르다. 수심水心을 배려한 어울림이다. 이처럼 ‘공생의 디자인’은 전혀 다른 물성을 지닌 개별성을 파악하고 개성을 도드라지지 않게 하면서 속도와 편리에 매몰된 ‘느림 회복’을 구하는 철학이다. 심오한 내용을 흑백사진을 곁들여 차분하게 서술한《공생의 디자인》은 한 권의 명상록으로 읽기에 충분하다.




곁) 정원(庭園)은 한자로 ‘뜰 정’과 ‘동산 원園’자를 쓴다. 우리말로는 ‘뜰’이나 ‘뜨락’에 해당된다.

‘한국 뜰’보다 ‘한국 정원’이라는 오랜 언어 습관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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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기21 2015.04.30 16: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언니, 잘 지내셨어요? 통 안부인사도 못 했네요...


⊙ 홍도 ‘슬픈여바위’



겨울 파도가 치는 날

혼자서 홍도를 차지하니

아름다운 것뿐이다.

아름다운 것 보고 나니

쓸쓸한 것뿐이다.

쓸쓸한 것 보고 나니

서러운 것뿐이다.

-이생진, 아름다움-




홍도에 가면 ‘슬픈여바위’가 있다. 바위에 깃든 사연이 말 그대로 슬프다. 옛날 홍도에는 금슬 좋은 부부와 일곱 남매가 살았다고 한다. 설이 다가오자 부부는 차례음식과 설빔을 사려고 뭍에 나갔다. 섬에 남은 일곱 남매는 날마다 산에 올라 부모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어느 날 수평선 너머 부모가 섬에서 타고 나간 배가 나타났다. 일곱 남매는 부모를 마중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배가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충격을 받은 일곱 남매는 슬픔에 겨워 부모를 따라 바다 속으로 들어갔고 나중에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고속 페리를 타고 편하게 왕래를 하지만 돛단배를 타고 노를 저어 뭍을 가던 시절에 섬사람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다. 섬은 풍랑에 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지천이었다. 심지어 마을 남자들은 제삿날이 같았다. 마을 남자들을 태운 고깃배가 침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섬은 영화와 소설과 산문과 시로 거듭 재생되면서 슬픔 유전자를 고스란히 전했다. 시절이 크게 바뀌어 더 이상 섬 남자들은 돛단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는다. 낚싯배나 유람선을 몰면서 물고기 대신 현금을 얻는다. 바다에 빠져 죽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그런데 섬은 왜 여전히 아리고 슬픈 표정을 거두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를 작가 강제윤은《섬 택리지》호미. 2015. 1에서 이렇게 말한다. “섬은 우리 국토에서 가장 소외된 땅이다.” 오랫동안 관심을 받지 못한 섬은 그 때문에 자연환경이 잘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고유문화 원형이 계승될 수 있었던 것도 소외된 땅이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산업근대화 바람을 맞이한 뭍과 다르게 섬은 투박하지만 순정한 자태를 지켰다. 물고기를 잡고 땅을 일궈 자립했다. 자녀를 뭍에 보내 공부시키면서 부모는 섬을 지켰다. 그리고 이제 섬이 늙듯 부모는 늙었다. 늙은 부모는 섬 집에 남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떠올리듯 옛날을 말한다.


여름에는 뻘 냄새가 나서 맛이 없지만 겨울에 장작불에 구워 먹는 몬치작은 숭어 는 은어처럼 수박향이 난다고 한다. 한두 번 그물질에 한 광주리씩 잡히던 몬치는 지금은 몇 마리 잡힐 뿐 구운 몬치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사라지고 있다. 그악스럽고 왁달박달한 사람 생태계가 바뀌자 바다 생태계도 달라진 것일까. 자은도 앞바다에 파시波市가 설 때 바다를 가득 메웠던 배 3천척이 사라진 바다는 관광 유람선 뽕짝 음악으로 출렁인다.


신안군 앞바다에 옹기종기 모인 섬이 1004개에 달한다고 해서 “천사의 섬”으로 부른다. 4천여 개에 달하는 한국 섬 가운데 4분의 1이 신안 앞바다에 있다.《섬 택리지》는 신안 앞바다 스물 한 개 섬에 깃든 잊히고 지워지는 자취를 꼼꼼히 경청하며 채록했다. 노을이 질 때 섬전체가 붉게 물드는 홍도, 정약전이 자산어보玆山魚譜 를 집필한 흑산도, 정약전이 동생 정약용과 만나기로 하고 2년을 기다리다 죽은 우이도, 당제堂祭 를 지낼 때 송아지를 쉰 세 덩어리로 각을 떠서 멀구슬 나무 아래에 모여 마을 사람 골고루 나눈 박지도, “육지가 그리워서 그만 목이 길어지고 말았다.”던 수화 김환기金煥基(1913~1974) 화가가 태어난 곳 안좌도, 고려시대 큰 절집이 들어섰던 팔금도, 한국 최서남단 섬 가거도,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 <삼시세끼>로 유명한 만재도는 목포에서 뱃길로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려야 닿는다. 만재도는 선착장 바다가 얕아 종선從船 : 큰 배에 탄 여객을 옮겨 싣는 작은 배 을 운행한다고 한다.


뭍에서 뚝 떨어진 바다에서 섬끼리 곁을 내 주고 살포시 기댄 신안 앞바다는 다양한 자연환경 못지않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저자가 “10여 년 동안 섬을 헤매고 섬에 미쳐 섬을 떠돌며 살았던” 이유도 어쩌면 이야기를 찾는 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야기야말로 인류의 보고寶庫 이며 지구를 지탱하고 나아가는 주춧돌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갈증하고 찾고 만들며 재생산한다. 이야기 원형을 날실과 씨줄로 직조해서 창조와 환원을 짓고 반복한다. 섬에 깃든 수많은 전설과 풍문과 기록은 섬이 뭍을 그리워한 손짓이었을지도 모른다. 뭍만큼 많은 이야기를 갖고 싶은 절절함 말이다.


그래서 섬은 유독 전설과 신화가 많다. 부부 싸움을 하고 집을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나무가 된 자은도 여인송, 바다를 사이에 두고 사모한 비구와 비구니가 돌을 놓아 만든 박지도와 반월도 다리, 마을 여자들의 바람기 원인으로 지목된 안좌도 여근석은 소나무를 심어 시야를 차단당했다. 흑산도 진리 마을 처녀귀신은 때마침 정박한 배를 못 떠나게 풍랑을 일으켰고 피리 부는 소년은 섬에 남겨졌다. 외로움과 슬픔에 겨운 소년은 처녀당 앞에서 피리를 불다가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바람이 불면 모래가 날리는 우이도 산태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처녀 총각이 죽어서 모래와 바람이 되어 만나는 모래 언덕이 있다. 섬에 있는 사막에서 저자는 “내내 머뭇거리고 언덕에 서 있다.”고 술회한다. 애절함이 절절해지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마음은 초점을 잃고 뿌연 사막에 서 있는 것 같다.


한국의 섬 역사는 공도 정책에 따라 운명이 바뀌었다. 왜구가 극성일 때는 주민을 내쫓고 임진왜란 이후 국경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입도를 허용했다. 그렇다고 주민에게 안전한 보장이 따른 것은 아니다. 심지어 주민이 맨손으로 개척한 땅을 조정에서 빼앗고 세금을 징수했다. 330년 동안 농민 투쟁을 이으면서 토지 소유권을 쟁취한 하의도는 한국 정치사에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탄생시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하의도 방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고, 육년 반의 감옥살이를 했으며, 스무여 해 동안 연금과 감시 속에 살았고, 삼 년 반의 망명 생활도 했지만 하의3도 농민들이 지닌 불굴의 정신으로 끝까지 투쟁했다.”


그러나 이제 섬은 옹골찬 기백 대신 늙은 목숨을 연명하기 여념 없다. 더 이상 배를 탈 수 없는 노인들은 시금치와 양파와 대파를 심고 외지에서 들어온 자본은 펜션과 콘도를 세웠다. 낚싯배로는 돈벌이에 성에 안 차 ‘천혜 자연’을 상품으로 개발했다. 바닷가 길을 터서 자전거 길을 만들고 모래밭에서 말을 타게 한다. 해안선 길이만 60킬로미터에 달하는 임자도 사구砂丘 : 모래 언덕 는 무사할지 의문이다. 야생 들깨가 많이 자랐던 임자도는 백암 성총栢庵 性聰 (1631~1700)이 난파한 중국 배에서 불교 경전을 수습한 곳이라고 한다. 오늘날 승가대학이나 학인 스님들이 처음 공부할 때 펼치는 교과서《치문緇門》도 임자도에서 가져 간 것으로 전한다.


민어를 잡기 위해 일본 규슈에서까지 몰려왔던 임자도 ‘타리 파시’는 자은도 파시와 함께 신안 앞바다 풍요를 누렸다. 자은도와 임자도 파시가 생물로 펄떡인 시장이었다면 만여 점에 달하는 송·원 도자기 유물을 발굴한 증도는 염장鹽藏 파시였다. 소금 섬 증도 상월포 파시에서 조기를 소금에 절인 ‘간독’ 다섯 개가 원형 그대로 있다고 한다. 저자는 섬을 일컬어 “자연과 문화의 원형이 남은 보물섬”이라고 말한다.


그 보물섬 노인들은 말머리마다 “옛날에는~” 하면서 입을 연다. 옛날에는 가난했지만 그래서 서러웠지만 지금보다 사람 사는 맛이 좋았던 것일까. 돈보다 사람을 먼저 챙긴 시절이었다는 뜻일까. 살 거죽에 윤기가 사라진 노인들은 살 거죽에 윤기가 흐르던 옛날을 돌아보며 고향이 자본에 종속되는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떠나간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노인들이 손님에게 툭 던지는 한 마디, “밥 먹고 가시오”, “구경삼아 가시오. 싸득싸득”, “대접이 소홀해서 미안허요. 또 오시오”는 어쩌면 섬의 원형을 몸으로 기억하고 기록한 마지막 세대의 유언처럼 들려 스산하다.


한국에서 바다 작가 세 명을 꼽으라면 시인 이생진, 에세이스트 강제윤, 소설가 한창훈이 있다.《그리운 바다 성산포》로 유명한 시인 이생진은 ‘섬 시인’으로 불린다. 천여 개 섬을 다니고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섬 시’를 짓고 책을 냈다.《하늘에 있는 섬》,《저 별도 이 섬에 올 거다》,《시인과 갈매기》,《걸어 다니는 물고기》,《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바다에 오는 이유》,《먼 섬에 가고 싶다》등이 있다.


 ‘섬 에세이스트’ 강제윤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섬 기행문을 썼다. 직접 배를 타고 섬을 건너서 걸었다. 그동안 쓴 책 열여섯 권 가운데 섬 이야기가 반이다. 나머지도 섬을 곁들였거나 바다 이야기이므로 강제윤에게 섬은 자전 행장기行狀記 인 것 같다. 시인 이생진이 허무와 무미를 격렬한 바다에 녹였다면 소설가 한창훈은《내 밥상 위의 자산어보》와《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에서 보듯 소주를 마시며 능글맞고 쓸쓸하게 바다를 말한다.


에세이스트 강제윤은 생수 한 병 챙겨 하염없이 섬 길을 걷는다. 그래서 강제윤의 섬은 지루하고 고적하다. 뙤약볕 아래 묵묵히 걷는 강제윤은 “섬에 미쳐 섬을 떠도는 자”의 옹이가 느껴진다. 전작《보길도에서 온 편지》,《걷고 싶은 우리 섬》,《섬을 걷다》에 이어 희미하게 시간 속에 묻히는 섬을 조명한《섬 택리지》는 한층 더 쓸쓸하다. 이 느낌이 주관에 기인한 것일까 의문하는 동안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작가의 이야기를 책상머리에 앉아 이해할 수 없다면 당장 길을 떠나보라.” 


어떤 사람은 당장 길을 떠날 수 없다. 남이 들려준 이야기를 넝마주이처럼 주어 담으면서 미지의 세계를 상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누구나 길을 떠날 수 있지만 누구나 길을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안 앞바다 섬에 다리가 이어져 뱃길이 끊어지기 전에 사라지는 역사를 채록한 이 책을 들고 떠나고픈 새봄이다. 저자의 말처럼 “지구 地球 가 아니라 수구水球 에 사는 우리 모두가 섬사람이므로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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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한 왕이 살았는데, 그는 이 지구상의 모든 권력과 금은보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명랑해지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점점 더 침울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자기의 궁정요리사를 오게 해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오랫동안 충직하게 짐을 섬겨왔고 짐의 식탁을 가장 훌륭한 요리로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제 짐은 그대의 요리솜씨를 마지막으로 한번 시험해 보고 싶다. 그대는 짐에게, 짐이 50여 년 전 내 나이 한창일 젊은 시절에 시식해 보았던 산딸기 오믈렛 요리를 만들어야 하네. 50여 년 전 그때 짐의 선왕은 동쪽에 있는 나쁜 이웃 왕과 전쟁을 했었지. 그때 그 왕이 싸움에 이겨 우리들은 도망을 쳐야만 했어. 그래서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도망을 쳐 드디어 어느 날 어느 어두컴컴한 숲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숲속에서 길을 잃어 허기와 피로에 지쳐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어느 조그만 오두막을 발견하게 되었지.


그 오두막집에는 한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그 노파는 뛰어나와 우리를 반기면서 손수 부엌에 나가서 곧 무엇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산딸기 오믈렛이었어. 내가 이 오믈렛을 한입 입에 넣자마자 나에겐 기적처럼 힘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고 또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았어.


그때만 해도 짐은 미성년의 소년이었고 또 너무 젊었기 때문에 이 맛있는 요리가 얼마나 좋은 것이었던가를 오랫동안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러나 짐이 훗날 이 요리가 생각이 나서 짐의 전 제국을 뒤져 그 노파를 찾아보게 했지만 그 노파는 물론이고 그 노파의 산딸기 오믈렛을 요리해 줄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대가 만약 짐의 이 마지막 소원을 성취시켜 준다면 짐은 그대를 짐의 사위로 삼아 이 제국의 후계자로 만들 걸세. 그러나 만약 나의 기대를 만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그대는 죽어야만 하네.”


이 말을 듣자 궁정요리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폐하! 정 그러시다면 교수 형리를 곧장 불러주십시오. 물론 저는 산딸기 오믈렛 요리법과 하찮은 냉이에서 시작해서 고상한 티미안 향료에까지 이르는 모든 양념을 훤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믈렛을 만들 때 어떻게 저어야 마지막 제 맛이 나는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저는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제가 만든 오믈렛은 폐하의 입에 맞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폐하께서 그 당시 드셨던 모든 향료를 제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전쟁의 위험, 쫓기는 자의 주의력, 부엌의 따뜻한 온기, 뛰어나오면서 반겨주는 온정, 어찌 될지도 모르는 현재의 시간과 어두운 미래, 이 모든 분위기는 제가 도저히 마련하지 못하겠습니다.


궁정요리사가 이렇게 말을 끝맺자 왕은 한참동안 묵묵부답이다가 곧 그에게 선물을 가득 챙겨 주고는 그를 그의 직책으로부터 파면시켰다고 한다.


_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산딸기 오믈렛〉_




‘아우라(Aura)’는 “예술 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가리킨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7.15~1940.9.27)이《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처음 언급한 ‘아우라’는 이후 작품의 가치를 논할 때 자주 사용됐다. 벤야민은 앞에서 인용한〈산딸기 오믈렛〉에서 보는 것처럼 ‘아우라’를 거론할 때 ‘원본의 힘’을 강조한다. 아직 기술복제가 등장하기 이전 원본은 곧 진리였다. 복제가 실현되자 기술은 반론을 제기했다. 즉 “원본은 순간에만 존재할 뿐 감동은 별개”라는 논리다. 짝퉁도 얼마든지 감동을 유발하고 아우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복제는 대중에게 예술을 쉽게 제공했다. ‘특정’과 ‘고급’을 상징했던 예술은 복제를 거듭하여 대중을 장악했다. 예술은 이제 앤디 워홀의 콜라병 복사처럼 일상이 되었다. 마침내 예술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기계(사진기)를 이용한 사진을 두고 예술이다 아니다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결론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신자유주의의 무한 확장은 상상 이상의 생산물을 쏟아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한 생활양식과 기술이 출현했다. 감동의 시간은 갈수록 짧아진다. 이제 사람들은 복제에 만족하지 않는다. 피조물을 만든 신을 흉내 내듯 개조를 원하게 된 것이다. 


자본은 행성 지구와 인류가 지금까지 만든 모든 원본을 구닥다리로 여기는 것처럼 자연을 뒤엎고 문화를 바꾸고 마침내 사람의 삶까지 쥐락펴락한다. 정치, 경제에 이어 자연과 예술마저 자본의 숙주가 된 지금 사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 사진집《변경 지도》(이상엽 지음. 2014.12. 현암사)를 읽는 동안 발터 벤야민의 ‘원본 아우라’에 대해서 생각했다.


《변경 지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은 ‘변경’외에 ‘자본주의의 민낯’이다. 표현을 바꿔도 ‘신자유주의의 광풍’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2008-2014 변경을 사는 이 땅과 사람의 기록〉이라는 부제에서 보듯 2008년에서 2014년까지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했다. 


변경은 소외된 땅이며 강제로 밀려난 땅이고 곧 사라질 땅이다. 있었으나 없어질 땅이고 없는 땅이다. 곧 잊힐 땅이므로 기억에서 버려진 땅이 변경이다. 변경의 미래는 그렇다. 그 땅을 이루던 자연과 그 땅에 기대 살던 사람이 완악한 자본의 광풍에 스러진 곳이 변경일까. 이 땅 어느 곳이 변경인 것일까.


“만들어진 아름다움에 감추어진 신음하고 소외된 우리 땅을 톺아보려 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이자 르포르타주 작가 이상엽의 글은 곡진하며 사진은 응축됐다. 뉴타운 정책, 4대강 사업, 장애인 복지, 해고 노동자, 송전탑과 원자력발전소, DMZ, 세월호 참사. 사진이 가리킨 현장을 나열하고 이름표를 붙여보자. 용산, 마포, 낙동강, 금강, 새만금, 차별, 쌍용자동차, 기륭전자. 콜트콜텍, 밀양, 고리, 연평도, 교동도, 안산, 팽목항, 광화문까지. 여기에 꼬리표를 붙인다면 재력과 지위를 들먹이며 냉소와 차별을 던지는 몰지각이 될 것이다. 


“변경은 내 안에 있었다. 멀고 황량하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변경. 변경은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풍경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변경은 공간적으로만 구축되는 것은 아니다. 변경은 서사를 통해 사람들에게 공통의 경험, 역사적 기억에 관한 의식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관행과 담론 속에서도 구축된다.”


영토의 단위를 넘어 ‘인간 본성의 갈비뼈’ 사이에 깃든 ‘타자 밀어내기’까지 변경은 현실이다. 저자는 국가와 국민으로 연결된 유기적 신체 관계에서 부분이라도 절단되면 ‘단절’을 대입해도 해석이 가능하다 사람의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변경을 여행했거나 변경에서 살았거나 변경을 목격하고 경험한 신체는 아프다. 저자가 가리킨 시간의 경과 속에서 지속된 자연스런 영토적 단위를 ‘지리적 신체’에 비유한다면 지리적 신체를 절단하고 불태우는 행위는 지리적 신체에 깃들었던 사람의 삶을 떠밀거나 주저앉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나의 울타리’ 바깥으로의 외출이 쉽지 않은 연대가 필요하다. 사람은 자기 터전과 몸을 이기주의의 진지로 삼는다. 그악스런 배타성은 지리적 신체와 사람의 신체가 연결됐고 지리적 신체끼리 혹은 사람의 신체끼리 그물코처럼 이어졌음을 부정한다. 그러나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착취 대상으로 삼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파국은 당분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중심과 변경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며 사회 전체를 유동하게 만든” 신자유주의의 힘찬 페달 때문이다.


저자가 찍은 흑백사진은 손으로 만지면 검은 물이 뚝뚝 묻을 듯 농축됐다. 극사실로 드러난 사진은 검고 무겁고 눅눅하다. 안셀 애덤스(Ansel Adams 1902~1984)가 참여했던 ‘F64’ 그룹[각주:1]의 풍경 사진처럼 더하고 뺌 없이 사실을 재현했다. 파괴와 침탈을 날것으로 기록한다. 저자가 이렇게 ‘있는 그대로’를 은폐하지 않고 고통을 드러낸 사진을 찍게 된 뿌리를 폴 스트랜드(Paul Strand 1890~1976)[각주:2], 루이스 하인, 아론 시스킨드, 헨렌 레빗, 잭 매닝이 만든 좌파 사진가 집단 ‘포토리그’[각주:3]에 있다고 밝힌다.1936년부터 1951년까지 뉴욕에서 활동한 ‘포토리그’는 사진사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사진 그룹이었다.


“사진은 막대한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다. 사진가들에게는 오늘날 세계에 대한 참된 이미지를 기록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오랫동안 사진은 조형주의자들의 헛된 영향 때문에 고통 받아왔다. 포토리그는 미국을 쵤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사용하려는 정직한 사진가들의 손에 카메라를 되돌려주려는 것이다”_포토리그 선언문


⊙ 루이스 하인: 이탈리아 상점가의 눈먼 거지.1911년


저자가 찍은 사진은 ‘F64’나 포토리그’의 맥락을 이어받아 사회의 구석진 곳, 습하고 균열된 곳, 고통받고 울음이 넘쳐나는 곳을 향해 초점을 맞춘다. 그곳은 예열 없이 훅 달아올랐다가 단박에 잿더미로 변한 폐허다. 새만금은 기네스북에 올랐고 관광명소가 되었다. 물고기는 사라지고 물고기를 낚던 사람은 도시 일용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밥벌이의 자존감이 부정된 삶이다. 한반도 남쪽에 모래사막을 만들었던 4대강 사업은 토건광풍의 산증인이다. 사람과 새와 나무와 물고기의 풍경을 공책을 쭉 찢어버리듯 한 번에 버렸다. 저자는 이 극렬한 만행의 주범으로 “자본과 오래된 권력”을 꼽는다.


자본과 오래된 권력은 ‘중앙의 힘’을 상징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저자가 지적하지 않은 비수 하나를 추가한다. 변경에 거주하면서 중앙을 숭모하는 무리 말이다. 무리라고 하니까 특정 집단처럼 비춰질 수 있겠지만 그 스스로 피해자 운명에 처하면서 왁달박달[각주:4]하고 욱대기[각주:5]한 변경의 일부 거주자들이야말로 변경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잽싸게 짓밟는 자이기도 하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를 왕복하면서 변덕을 부리는 이들의 목적은 자본과 권력을 향한 야욕을 무관심과 지적 나태로 위장한다. 지킬 수 없는 공약을 떠벌리고 조작을 일삼는 정치인을 뽑아주는 손은 누구의 손이던가.무지와 몰지각의 근기란 얼마나 강하던가! 칸트의 말처럼 손은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인 것이다.


에둘러 자본주의니 신자유주의니 어렵게 말할 필요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땅은 겨울이었다. 봄이면 꽃이 피고 아이들이 태어나지만 한동안 이 땅은 겨울일 듯싶다. 


자살률 세계 1위, 청소년 자살률 1위, 낙태율 1위, 이혼율 1위, 고아 수출 1위, 대학 학비 부담률 1위, 40대 남자 사망률 1위, 빈부 격차 1위, 국민소득 대비 부동산 값 1위……비정규직 노동자 900만 명 전체 노동자의 50%, 생계형 알바 300만 명, 무직 가구 비율 17%여섯 가구 가운데 한 가구, 청년 백수 450만 명, 부패지수 아시아 3위, 생활만족도 OECD 꼴찌, 인구 1%가 사유지 57% 독점, 인구 10%가 국가 전체 부의 74% 점유, 곡물 자급률 26%로 OECD 꼴찌, 4인 가족 월수입 150만 원 이하 750만 명, 노동시간 OECD 1위……


다시 맨 처음 ‘아우라’로 돌아가 보자. 


“벤야민의 1932년 소논문인「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사진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기여를 한다”고 했다. 벤야민은 사진을 그림처럼 찍거나 꾸미거나 해서 거기에 ‘아우라’를 다시 불어넣으려는 시도는 종교적인 맹목주의라 했다.


우리는 사진의 어디에 투신해야 하는 것일까. 원본이 지닌 ‘결’과 ‘틈’마다 옹골차게 스며 들어찬 촉수이다. 더듬거리고 흔들리는 가운데 내밀성 지향을 지속할 때 진실은 말한다. 저자의 결기가 압축된 사진은 저자 스스로 “절망에 길들임이 두려워” 사진을 찍는다는 대목에서 나는 제이콥 브로노우스키(Jacob Bronowski 1908-1974)[각주:6]가《인간 등정의 발자취》에서 말한 “손은 정신의 칼날”이 떠오른다. 변용하자면 ‘눈은 정신의 등사기’이다. 초점이 어느 곳을 맞추고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사진이 찍히기 때문이다.




  1. 1932년 에드워드 웨스턴을 중심으로 그이 영향을 받은 (주로 미국 서해안에서 활동하던) 사진가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한 그룹. 안셀 애덤스(Ansel Adams), 이모켄 커닝엄(Imogen Cuningham), 존 폴 에드워드(John Paul Edwards), 소냐 노스코비아크(Sonya Noskowiak), 헨리 스위프트(Henry Swift), 윌러드 반 다이크(Willard Van Dyke), 에드워드 웨스턴(Edward Weston)의 멤버로 구성되었다. F64는 피사계 심도를 극대화하고 사물을 선명하게 묘사하기 위해 대형 카메라 렌즈의 조리개를 가장 작은 구경으로 조인 조리개 수피를 의미한다. 주로 자연을 소재로 미국의 독특하고 웅대한 충경이나 나무, 바위 등의 조형을 리얼리즘에 입각해서 표현함으로 써 자연의 신비, 존엄성 등의 묘사를 추구했다. 1932년 샌프란시스코의 드 영 기념 미술관(M. H. de young Memorial Museum)에서 창립 전을 개최했다. 그룹 활동은 단기간이었지만 부드러운 톤의 회화주의 사진이 주류였던 당시 전위적인 그룹으로서 사진 계에 강렬한 영향을 끼쳤다. 극사실 풍경을 사진으로 재현하는데 힘썼으며, 국립공원 파괴 과정을 공개해 자연훼손 경각심을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본문으로]
  2. 미국 사회주의 동맹에 소속된 좌파 사진가. 러시아 영화감독 에이젠슈테인에게 영화를 배우고자 러시아로 건너갔지만 매카시 열풍에 밀려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떠돌았다고 한다. [본문으로]
  3. 1936년부터 1951년까지 폴 스트랜드가 주축이 되어 뉴욕에서 활동한 사진가 그룹이다. 1930년 국제노동자구조협회 문화 활동으로 시작했다. 강연, 사진교육, 취재, 전시,사진 작업, 잡지 발행 등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빨갱이 사냥에 몰려 해체됐다. 포토리그에서 사진을 공부한 사람이 1.500명 이상이었고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들을 배출했다. 오늘날 다큐멘터리 사진은 포토리그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한다. [본문으로]
  4. 성질이나 행동이 곰살갑지 못하며 조심성 없이 수선스럽다. [본문으로]
  5. 1. 난폭하게 윽박질러 위협하다. 2. 억지를 부려 우겨서 제 마음대로 해내다. [본문으로]
  6.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을 찾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20세기의 진정한 지식인. 수학자, 희곡작가, 생물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이다. BBC의 다큐멘터리 《인간 등정의 발자취The Ascent of Man》의 진행자와 동명의 책 저자로 널리 알려졌다. 1908년 폴란드에서 태어나, 1차 대전 중에 독일로 이주했으며, 박해를 피해 1920년에 가족이 모두 영국 런던으로 이주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 후 영국 국토안전부에서 일하였고, 2차 대전 중에는 영국 공군을 위한 폭격전략을 수학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을 했다. 영국 석탄국 소속 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하면서,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원폭투하 소식을 듣고, 전공을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바꾸었다. 1945년 원자폭탄의 효력을 연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다가 재앙과 같은 끔찍한 실상을 목격한 뒤 군사연구를 중단했다. 그때부터 과학의 도덕적인 측면에 관심을 갖고 생명과학과 인간성 탐구로 연구 방향을 선회하면서 과학의 인간적 측면을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1964년부터 죽을 때까지 미국 샌디에이고의 소크 생물학 연구소에 근무하면서 생물철학 분야에서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했다. 주요 저서로 《인간을 묻는다》 《과학과 인간의 가치》 《인간 등정의 발자취》 《서양의 지적 전통》 등이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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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이다. 이맘때쯤이면 온갖 일이 떠오른다. 한 해의 대차대조표는 냉정하다. 인디언 크리크족은 12월을 ‘침묵하는 달’이라고 한다. 아리카라족은 1월을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로 부른다. 세밑에는 침묵하고 싶다. 일 년 동안 떠들던 입이 피로해진 까닭이다. 기회가 생긴다면 책 몇 권을 챙겨 수도원 피정을 해도 좋겠다. 





차분한 문체와 유쾌한 박식함으로 쓴《침묵을 위한 시간》(패트릭 리 퍼머 지음. 신해경 옮김. 봄날의책. 2014. 10)은 세밑에 읽기 좋다. 제목에 ‘침묵’이 들어갔지만〈유럽 수도원 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수도원이 침묵의 장소임을 상기하면 수도원 기행은 내면으로의 여행이기도 하다. 기도와 명상과 노동이 진중하게 움직이는 수도원은 피로한 세속의 관계를 차분히 정리하는데 제격이다.


여행 작가 패트릭 리 퍼머(1915~2011) 이력이 흥미롭다. 책소개에 의하면 아버지는 유명한 지리학자였고 어머니는 부유한 상인의 딸이었다. 상류층에서 태어났으나 외롭게 큰 것 같다. 부모는 사업차 인도에 있었고 퍼머는 영국에서 혼자 자랐다. 부모는 사춘기 때 이혼했다고 한다. 부유했으나 학교생활은 엉망이었다. 술과 여자와 파티에 빠지는 바람에 징계와 퇴학을 반복하며 학교를 전전했다. 


돌연 열여덟 살에 네덜란드 훅판홀란트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 걷기 여행을 한다. 이 여행은 퍼머에게 ‘여행 작가 씨앗’을 심어준다. 일찌감치 삶의 지겨움과 따분함을 경험한 소년은 혼자 걷기 여행에서 세계를 향한 왕성한 호기심과 지적탐구를 수혈 받은 셈이다. 


여행은 계속됐다. 그리스에서는 때마침 그곳을 방문한 열여섯 살 연상 루마니아 공주와 사귄다. 연상의 연인은 오랫동안 퍼머에게 돈을 댔다. 그러나 1950년대 냉전체제로 접어들자 동부유럽은 단절의 땅이 되고 두 사람은 절연한다. 번듯한 집과 이렇다 할 직업이 없던 퍼머는 뛰어난 사교술을 발휘하여 유명인사 집을 돌며 생활했다.


24년 동안 연인관계였던 사진작가 조앤 레이너와 중년에 결혼하기까지 숱한 여성과 염문을 뿌렸다.《인간의 굴레》,《달과 6펜스》를 쓴 소설가 서머싯 몸은 퍼머를 가리켜 “상류층 여성들을 상대하는 제비”라고 비난했다. 세간의 이목과 구설수에 태연하던 퍼머는 아흔 여섯 살에 죽을 때까지 술과 담배와 여자와 파티와 여행을 좋아했다고 한다.


여기까지 보면 퍼머는 철저히 세속적 인간이다. 한편으론 수도원 피정을 즐겼다. 술과 담배와 여자와 파티는 침묵과 안 어울린다. 세속의 쾌락을 실컷 누린 퍼머에게 수도원은 어떤 곳이었을까.《침묵을 위한 시간》에 수록한 수도원 네 군데 가운데 두 곳의 첫인상은 “무덤 같았다.” 대체 그곳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저자는 쓰고 있던 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피정을 간다. 집중하여 집필을 마칠 조용한 장소로 수도원을 골랐다. 1950년 늦여름 약속 없이 찾아간 생 방드리유 드 퐁트넬 대수도원은 침묵 속에 잠겼다. 베네딕트회 수도원인 이곳은 오전 네 시에 일어나 오후 아홉시 잠들 때까지 기도와 명상, 찬송과 노동, 공부가 매일같이 반복된다. 낭송이나 기도시간 외에는 수도사들의 목소리를 듣기 어려웠다. 목소리를 낮춰 말하고, 회랑을 걸을 때는 발자국 소리를 조심해야 했다. 늘 무엇인가 바쁘거나 몰두해 있는 수사들은 침묵 가운데 움직였다. 그들은 이승의 사람 같지 않았다. “주름 없는 여윈 얼굴로 단 한 번의 웃음도 찌푸림도 없었다.”


수도원 연쇄살인을 다룬 움베르토 에코의 추리소설《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원 분위기와 비슷하다. 베네딕트 수도회 분원인 이탈리아 북동부 두메산골 수도원 살인사건은 웃음을 죄악시 여긴 늙은 수도사의 범행이 자행된다. 웃지 않고 말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기도와 찬송과 노동을 하는 수도사들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세속의 쾌락을 버리고 이들은 왜 수도원으로 들어갔을까? 수사들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외려 좀 더 일찍 수도원으로 들어오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수도원에 들어오기 전에 바깥세상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퐁트넬 수도원(Fontenelle Abbey)은 629년 설립 이래 갖은 풍파를 겪었다. 노르만족 침입으로 폐허가 되고 재건이 된 후에는 영국과의 전쟁을 겪으며 신병모집 장소로 전락한다.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고 왕권다툼의 중심지였으며 백년전쟁 때는 피난처가 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때는 심지어 석재가 팔려 나갔고 2차 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병영으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역사의 상처를 수습하고 퐁트넬 수도원은 재기에 성공했다. 그 저력은 수도사들의 굳건한 믿음과 한결같은 신앙심을 주축으로 삼은 성실한 순명일까.


수도원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암투와 파괴와 복구가 엄격한 규율에 따라 실행됐다. 그러나 수도원이 존속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도서관 때문일 것이다. 수도원 도서관은 세속을 떠난 사람이 지적결핍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세속에서 실현하지 못한 지적 탐구심을 추구했다. 벨럼(Vellum : 양피지)으로 표지를 만든 책과 고대부터 전해 온 필사본과 앙페르(enfer : 지옥)라고 불린 비밀의 장서각에 숨은 금서까지 호기심을 자극했다. 수도사들은 수세기 동안 고대 언어를 비롯해 학문과 인문과학을 연구하고 자료를 보존하는데 기여했다. 그래서 저자는 수도사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류의 도덕적 월권을 줄이는 익명의 독지가이자 위스망스가 말한 ‘사회의 피뢰침’이다.”


수도원 도서관은 인류역사를 보관한 거대한 문헌박물관이자 수장고인 셈이다. 저자는 청빈과 침묵 가운데 수도사들은 문외한들이 결코 이해 못할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 퐁트넬 수도원 피정을 지내는 2주 동안 무덤 같았던 수도원은 몇 주가 지나자 “무덤의 정반대가 되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나는 마침내 견고한 상아탑에 들었으니 현실에서 도피하는 자는 수사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나를 받아준 수사들에게 대수도원은 영원으로 향하는 도약판이었고, 나에게는 책을 쓸 공간을 내준 은신처이자 더욱더 효과적으로 혼돈스러운 세상 속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준 용수철이었다.” 


수도원에서 보낸 여름을 뒤로 하고 10월에 세속으로 돌아온 저자는 불쾌한 기분을 토로하기에 이른다. “바깥세상이 졸부와 매춘부와 사기꾼이 득실거리는 시끄럽고 천박한 지옥처럼 느껴졌다.”


모든 수도원이 퐁트넬 수도원처럼 침묵 가운데 존재의 본질을 투사하며 평안과 풍요로움을 수혈해준 것은 아니다. 트라피스트회 라 트라프 수도원은 도서관은커녕 독방조차 없다. 수도사들은 원장부터 수련수사까지 판자 위에 볏짚을 깔고 합숙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은 극단적 내핍이 엄격한 수도회다. 새벽 한 시나 두 시에 일어나 하루 일곱 시간을 기도와 명상을 한다. 나머지 시간은 농사를 짓느라 공부할 시간조차 부족하다고 한다. 계절에 상관없이 두꺼운 옷을 입고 근채류만을 먹는다.


청빈과 겸손, 희생을 강조하는 라 트라프 수도원 피정은 저자에게 적잖은 혼란을 준다. 세상에는 중요한 가치이지만 이해하기 어렵거나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검소와 절약이 그렇다. 세속에서는 궁상맞고 쪼잔한 생활처럼 비칠 수 있으나 수도자의 검소함은 불필요한 생산물로 인한 욕심을 자제하는 행위이다. 이처럼 라 트라프 수도원이 수도자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기원은 신앙의 소명 때문이 아니었다고 한다. 10세기는 나태에 빠진 베네딕트 수도회에 개혁바람이 불었고 한동안 교회는 금욕생활로 돌아갔다. 그러나 다시 도덕과 신앙심이 흔들리면서 교회는 타락의 길로 들었다. 12세기 들어 시토 대수도원(여기서 시토회가 처음 등장한다)에서 이전과는 다른 더 엄격한 금욕 개혁이 시작되었다. 가혹하다 싶었으나 시토회를 따른 수도사들은 베네딕트에서 떨어져 나와 시토회를 만들었다고 한다. 오늘날 라 트라프 수도원은 그 후예다.


그러나 인간은 완벽한 이성과 윤리로 무장한 철갑을 두르지 못했다. 나태는 틈만 나면 인간을 공격했고 교만은 잠식했다. 시토회 수도원은 해이해졌다. 물질을 좇고 고기를 먹었다. 그러다가 17세기 들어 귀족 성직자가 나타난다. 프랑스 왕비 마리 드 메디치의 무릎 위에서 자란 아르망-장 르 부티예 드 랑세는 일찌감치 천재성을 드러낸다. 스무 살이 되기 전 라틴어와 신학, 그리스어, 수사학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귀족 앞에서 설교를 했다. 앞날이 창창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운명은 영민한 청년 수도원장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수상한 관계의 사교계 지인인 몽바종 부인이 병에 걸려 죽고 목이 잘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린 연인은 공작부인의 시신을 확인했다.


충격이 큰 젊은 대수도원장 랑세는 재산을 정리한 뒤 하인을 데리고 자기 소유였던 라 트라프 수도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규율을 발표하고 실천했다. 오늘날 라 트라프 수도원은 당시 규율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전한다. 베네딕트 수도회조차 혀를 내두를만한 치열한 내핍이야말로 라 트라프 수도원의 본질이다.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실천을 따르는데 주력한 라 트라프 수도원 기도문에는 ‘대속(代贖)’ 을 뜻하는 ‘희생’을 추가했다. 베네딕트 수도회 기도가 ‘인간 구원’을 기반으로 했음을 떠올리면 트라피스트회가 만든 대속은 희생을 강제한 것으로 추정한다.


라 트라프 수도원은 상대방을 비판하는 공표(公表)와 스스로 채찍질을 한다. 게다가 정욕을 극복하기 위해 중세에는 속죄나 고문 때 입은 ‘염소털 셔츠(염소털 셔츠는 거칠고 따가워서 피부가 상한다)’를 입었다고 한다. 정욕과 싸우는 방법이 침묵과 기도와 노동만으로는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라 트라프 수도원을 두고 “거대한 회색 지하무덤”, “수도원이라기보다는 병원이나 보호시설, 또는 소년원처럼 보였다.”고 회고한다. 수사들과는 말을 나눌 기회조차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침묵의 고행을 수행하는 수도자는 평온한 미소와 너그러운 태도를 보였다. 인간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한계를 견딘 이후 평화가 찾아오는 것일까.


⊙ 시토회 수도원 회랑


11세기에 건축되어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간직한 솔렘 대수도원은 아름답고 성스럽다. 좁고 높은 고딕 아치들이 빽빽이 들어선 건물은 화려하고 복잡하다. 갖가지 장식으로 꾸민 긴 회랑은 빛이 잘 들어 화사하다. 그레고리오 성가의 완성도를 높이는 성당 중앙부는 온갖 프레스코화로 꾸며져 신들의 낙원 같다. 도서관은 풍성한 장서로 가득 찼다. 저자는 솔렘 대수도원에서 2주를 보내고 라 트라프 수도원을 갔다. 천국에서 연옥으로 간 것 같다고 한다.


숨 막히게 적막하고 엄격했던 라 트라프 수도원 피정을 끝낸 후 저자는 심경 변화를 겪는다. 

“처음에 느꼈던 우울함은 하루 이틀 사이에 사라지고, 우울은 트라프 대수도원의 어슴푸레한 매력과 절대적인 침묵과 고독에서 오는 일정의 피학적인 기쁨으로 바뀌었다. 내 마음은 고요하고 침착하고 부드러워졌다.” 


얼음물처럼 차갑고 바위덩어리처럼 딱딱했던 라 트라프 수도원은 초인적인 관대함과 이타심이 흐르는 공동체였던 것일지 모른다. 인간은 자기가 체험하지 않은 것, 체험할 의지가 없는 경계 너머에 인색한 평가를 내린다. 편견을 걷어내면 파란 언덕 위에 꽃물결이 치는 것처럼 밝은 모습이 눈이 띤다. 그러나 무엇을 이해하는 일은 혼동과 혼란을 극복한 이후의 일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라 트라프 수도원의 침묵고행에 대해 “한마디도 말할 자격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당혹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책 말미에 수록한 카파도키아 바위 수도원은 침묵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일지 모른다. 세속과의 단절은 물론 옆방과의 단절이 용이했다. 바위를 깎아 미로처럼 만든 방은 조로아스터교와 그리스도교, 비잔티움 군대에게 쫓겨 온 은수자들이 살던 곳이다. 먼저 방문한 퐁트넬 수도원이나 솔렘 수도원, 라 트라프 수도원과는 다르게 천연 지형물을 이용했다. 10세기부터 자귀와 끌로 바위를 쪼아 만든 바위 수도원은 오늘날 아무도 살지 않는다. 더 이상 은수자들은 바위 수도원에서 기도와 명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밤하늘의 유성을 보고 천체를 상상하던 고독한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수도원 기행문을 읽을 때 세속의 인간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세상과의 모든 접촉을 끊고 멀리 떨어진 수도원에 파묻히는 삶은 대체 어떻게 봐야 한단 말인가?” 신에 대한 흠숭과 정결을 굳건한 믿음으로 승화하는 사람이 수도자다. 기도의 효험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공동체에 짐이 되지 않게 스스로를 부양하고 누구도 해치지 않으며 이웃을 존중하는, 다른 여느 선한 인간들의 삶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삶”


침묵은 단순 현상 이상의 가치다. 단지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강력한 내재성을 구축하는 기반이다. 침묵을 잃은 오늘날 우리에게 침묵이야 말로 가장 큰 결핍일지 모른다. 옮긴이는 수도원 기행문을 이렇게 평한다. “이 책은 그 어떤 여행 서적보다 먼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내면 여행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깊이, 평생 탐구해야 할 여행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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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맹씨 행단 한옥은 햇빛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집이다. 여름에 바람이 잘 통하면 겨울에도 해가 잘 들게 되어 있다.






몇 해 전 잠깐 한옥열풍이 있었다. 격을 갖춘 고아한 집은 기품이 느껴졌다. 그러나 한옥열풍은 오래가지 않았다.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건축사학가이자 건축가인 임석재 교수는 한옥의 불편함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불편하다고 치부하는 한옥의 특징들 가운데 상당수는 우리보다 먼저 기계문명과 자본주의를 일군 서양 선진국의 현대 주거에 그대로 남아 있다.” 


즉 기계 의존도가 높은 오늘날 생활방식으로 한옥을 이해할 경우 한옥의 장점을 얻기 힘들다는 의미다.



《지혜롭고 행복한 집 한옥》(임석재 지음. 인물과 사상사. 2013. 10)은 한옥의 과학성과 미학을 휴머니즘에 접목했다. 한옥을 어려워하는 독자도 쉽게 접근하도록 도판과 함께 친절하게 설명한다. 저자가 한옥의 과학성으로 제일 부각시킨 부분은 ‘햇빛과 바람’이다. 여름태양과 겨울태양의 각도를 계산하여 처마길이를 조절하고 통(通)의 원리를 이용해 공간을 설계했다. 


그래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듯하다. ㄱ자 ㄷ자로 꺾인 구조와 사선 축까지 바람길을 텄다. 대문을 들어와 중문을 거쳐 안마당 지나 대청에 올라 뒷산과 통하는 바람길은 여름 남동풍을 겨냥한 기술이다. 한옥을 남동향으로 건축하는 이유는 이 바람길에 연유한다.


책에 따르면 바람길은 햇빛을 한 겹 걸러내는 창호문과 함께 ‘자연 순환’이다. 출입구를 폐쇄하고 에어컨을 켜거나 커튼이나 블라인드로 햇빛을 차단하는 서양 주택과는 상반된다. 


“순환이란 바로 통(通 )의 원리다. 바람을 단순한 온도 문제로만 파악을 해서 프레온 가스를 거쳐서 차게만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 서양 기계문명과의 결정적인 차이다.”


그래서 저자는 “한옥은 집 자체가 거대한 순환 덩어리”라고 말한다. 게다가 한옥의 다양한 동선구조는 놀이공간을 형성했다. 다락과 이중창호, 바깥채와 안채와 뒤채로 연결된 아기자기한 건물 배치는 비밀의 장원처럼 은밀하다. 분산된 갈림길과 숨은 공간은 숨바꼭질 같은 놀이기능을 한다.


한 공간에 모든 기능을 집어넣은 아파트는 한옥이 가진 포근함과 즐거움,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지 않는다. 통유리는 무표정하고 방향이 제 각각인 문은 냉랭하다. 편리함을 부여한 대신 폐쇄적이다. 저자는 집이 이렇게 변하는 동안 가족끼리 소통이 단절된 점을 지적한다. 심지어 오늘날 집은 면적과 꾸밈수준으로 집의 가치를 매긴다.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상실한 집은 잠을 자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어머니의 자궁처럼 깊고 아늑한 방, 몇 걸음이면 건너갈 수 있는 마당, 마당 건너 손에 잡힐 듯 한 행랑채, 막힘없이 들이고 열리는 햇빛과 바람. 한옥은 변화무쌍한 자연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거부와 차단 대신 수용과 관용을 택한 집이다. “모든 것을 손으로 만들어낸 수제(手製)작품”인 한옥은 기계중독에 걸린 오늘날, 순환과 소통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 위 글은 농민신문사 발행 월간지《전원생활》 1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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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담양의 대숲에서 태어났다. “저 바다가 열면 건너갈 텐데” 징용 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푸념 곁에서 자랐다. 전사통지서를 받고 제사를 지내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기다린 할머니. 잠들지 못한 밤이면 일어나 골방에서 담배를 물었다. 빨면 밝아지는 담뱃불을 등대라 생각했다. 골방 가득한 어둠이 검은 바다 현해탄이었다.”

 

 

《노름마치》(진옥섭. 문학동네. 2013.6.10) 책날개 저자 소개는 이렇게 시작한다. 문장은 뜨겁지만 날카롭지 않고 서늘하지만 따듯하다. 찰진 입말에 반해 도서관에서 발견한 즉시 빌렸다. ‘생각의 나무’에서 두 권으로 펴낸 책으로 부제로 <진옥섭의 예인명인>이 붙었다. 2011년 초가을 무렵 일이다.

 

전국의 숨은 예인들을 찾아다니며 꾸준히 무대에 올린 진옥섭 필체는 눅진하고 곡진하다. 언덕에 올라 굽이굽이 흐르는 강줄기와 그 아래 옹기종기 시린 등을 기댄 성냥갑만한 집들을 보는 심정 같은 애잔함이 흥건하다. 그래서 진옥섭의 입말은 눙치는 구라에도 불구하고 삶의 곡진한 태도가 느껴진다. 사투리가 책에서 사라지고 뻣뻣한 플라스틱 쪼가리 같은 서울말이 잠식한 출판풍토에서 참 오랜만에 만난 진도 홍주(紅酒) 맛이었다. 이문구를 현시하는 것처럼 반갑다. 마실수록 멈출 수 없는, 죽어도 좋을 맛이다.

 

열여덟 명 예인 이야기는 강렬했다. 제대로 취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인간인지라 책은 이미 절판되었다. 신열이 났다. 아쉬울 때마다 헌책방에서 책을 구해 준 한 사람이 그리웠다. 나에게 책 수백 권을 전해주고 생사를 알 수 없이 먼 길을 떠난 사람. 마지막으로 그와 나눈 대화는 집을 처분하고 독일을 갈 준비하며 찜질방에서 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즈음 그는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 나는 첫 책에 그의 이름을 꾹 박았다. 화석처럼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은 소식이 없고 곁에 두고 싶은 책도 구할 수 없었다. 도서관에서 서가를 돌다가《노름마치》를 만나면 책등을 집게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애달픈 연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포시 만져보는 것처럼. 그러나 뜨거운 열정은 다만 재가 되지 않도록 얼른 얼음 밑에 넣어 뒀다. 변덕은 오래 지나지 않아 망각으로 둔갑했다. 읽어야 할 책과 읽고 싶은 책, 소장한 책들 사이에서《노름마치》는 가뭇없이 잊혀졌다.

 

그리고 2013년, 아까시 꽃이 지고 뻐꾸기가 떠날 무렵《노름마치》는 내게 왔다. 오랜만에 설레면서 기다린 책이다. 기다리는 동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노름마치》는 신에게 넋이 점지된 사람들 이야기다. 이 글은 먼 길 끝의 노인정과 다방, 시장의 국밥집에서 마주앉아 물은 몇몇 예인들의 삶에 대한 이력서다. 춤, 노래, 굿, 악기에 미쳐서 한 생애를 불태웠던 사람들은 천상으로 떠났거나 대개 반귀신이 되었다. 늘씬 날씬 아이돌 가수와 섹끈매끈 배우들이 달라진 풍속을 차지한 가운데 ‘들판의 엉겅퀴처럼 사위어간’ 사람들이다.

 

권번에서 춤추고 노래 불렀다는 이유로 몸 파는 기녀로 오해 받아 자식에게조차 과거를 숨겼던 여인. 남편과 사별하고 병든 자식을 위해 소리 대신 삯바느질을 했던 여인. 놀이판에서 태어나 북채를 쥐고 춤이 아닌 숨을 췄던 남자. 정약용 집안에서 태어나 책을 버리고 소리에 미쳐 임종 사흘 전까지 공연준비 하다가 어느 날 아침, 앉은 채로 죽은 남자. 근대가 문지방을 넘고 조선땅으로 들어와 넘실대기 시작한 이래 끼와 생활이 뒤범벅되어 묻힌 사람들, 진옥섭은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온몸 가득 소름을 담아 한꺼번에 끼쳐내던 분들

 

“노름마치는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기 결합된 말로 최고의 잽이(연주자)를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다. 곧 그가 나와 한판 놀면 뒤에 누가 나서는 것이 무의미해 결국 판을 맺어야 했다. 이렇게 놀음을 마치게 하는 고수 중의 고수를 노름마치라 한다.”

 

책 앞머리에는 공옥진 선생의 ‘루주’도장이 박힌 계약서가 실렸다. 수첩 한 장을 찍 찢어 쓴 즉석 계약서다. 맞춤법에 맞지 않고 삐뚤빼뚤 썼다. 하지만 매우 정성들여 꼼꼼하고 깔끔하게 정좌해서 쓴 글씨다. 한 자 한 자 힘줘서 집중했다.

 

공옥진 창무극 공연비 육백만원 중 이백만 원 받고 남은 사백은 끝남과 동시에 받게 되었습니다. 동그라미를 그려 공(孔)을, 세로로 옥진(玉振), 가로로 한(恨)의 춤으로 쓰고 인주 없어 루주 묻혀 도장을 찍었다. 성(姓)씨 공(孔)을 동그라미로 표현한 재치가 돋보인다. 고수가 일군 구멍은(孔) 텅 빈다(空). 구속됨 없이 만경창파를 흐르고자 하는 염원이 공(孔)이며 공(空)이다.

 

《노름마치》엔 가수 심수봉 씨 고모 심화영 선생도 등장한다. 심화영 선생은 승무와 중고제 소리 명창이다. 풍류음악과 가야금 병창 명창이었던 심정순 선생의 따님으로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가풍을 이어 받았다. 오래 전 심선생을 일관계로 잠깐 뵈었지만 부드러운 자태와 목소리에 묻은 기품이 대단한 분이었다. 팔순이 넘어서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부침 심한 인생이었는데 화색을 잃지 않으셨다.

 

 죽림에 누웠어도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룬 분들 이야기는 앵두를 똑똑 따게 한다.(앵두는 눈물이란 뜻으로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의미).

 

서글프고 아련하고 애틋한 이야기를 진옥섭은 ‘촌부회담체’로 쓴다. 촌부회담체란 시골 농부들이 떠드는 일상어가 많이 섞인 문체를 일컫는다. 이규보가《백운소설》에서 처음 언급했다고 한다. 진옥섭의 촌부회담체는 앞 뒤 책날개에 소개한 진옥섭의 ‘뻥 연보’만 읽어도 ‘기똥찬 입담’에 넋을 뺏긴다.

 

몇 해 전 읽은 김수남 선생의《아름다움을 훔치다》(김수남 지음. 디새집. 2004.2.9)가 떠올랐다. <김수남이 남긴 한국의 예인들>이란 부제에서 보듯 평생 전통문화현장을 누비며 찍은 기록이다. 장터에서 광대놀이를 하거나, 인형극을 벌여서 군중들을 모으는 수상한 집회 따위는 하지 않겠노라고 매번 각서를 쓰고, 시말서를 쓰면서 남의 집 지하 전세방을 전전하며 풀칠에 연명했다. 군사정권 칼날은 이 땅 구석구석을 들쑤시며 고유문화를 발기발기 찢었다.

 

밀교자처럼 남아 있는 몇 명의 숨은 사람들은 시대가 변하면서 노령의 몸으로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지만 얼마 못가서 세대를 교체한다. 그러나 교체한 세대는 스승의 원력만큼 예풍을 회복하지 못했다. 후예들은 무대에서만이라도 자신들이 물려받은 기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근근이 연명한다.

 

《아름다움을 훔치다》에선 김소희 명창이 강렬했다. 서예공부를 하면서 안진경과 왕희지의 복합체를 구사한 명창 김소희. 명창의 원래 꿈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다. 글로써 시인이 되고 싶어 한 김소희는 사진 속에서 정갈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얌전한 난초처럼 정좌하고 앉아 가야금을 뜯고 있다. 선생의 생전 시는 소리였다. 소리로 시를 쓰고 간 사람들이 어디 김소희 하나 뿐이겠냐 만 울컥하고 울화가 터졌고 울울했다.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지나간 것의 그리움으로 만든 책 한 권에 감정을 흠뻑 적셔서 읽었다.

 

“춤은 몸으로 추는 것이 아니라 넋으로 추는 것이다. 그것은 뼈 마디마디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넋으로 한 생애를 불사른 사람 얼굴들이 책속에 가득하다. 스틸은 가고 화려한 동영상 시대에 한 점 불꽃처럼 살다 사그라진 예인 사진은 뭐라 말 할 수 없이 착잡하다. 

 

“영산홍로 봉접비 허니 옥화홍로를 허느라고 우쭐우쭐 진달화요 웃고피는 목단화라 낙화는 점점편편 홍이요 나는 언제 죽어 꽃이 되며 우리님 어느 시절에 죽어 나비 될거나~” 막걸리 잔 기울이며 육자배기 부르던 시절엔 최소한 지금처럼 돈에 악악대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진 않았다. 

 

박제가는《궁핍한 날의 벗》에서 글자는 하학(下學)이고 소리는 상달(上達)이다.”고 말했다. “청각은 시각보다 이상적이다.”(헤겔) 느끼지만 아무리 뛰어난 글일지라도 몸을 흔들며 뚫고 나오는 소리만 못하다.

 

앞날개부터 뒷날개까지 꽉 채운《노름마치》저자 소개는 이렇게 끝난다.

 

“스물한 살 청상과부였던 나의 할머니 ‘양춘댁’에게 이 글을 바친다. 책에 적은 글을 온통 바치고, 마지막 마침표 하나도 바둑알처럼 반질반질하게 닦아 바친다.”

 

40년 전 초등학교 다닐 때 할머니 봉초 살 돈을 훔쳐 영화 <당산대형>을 보고, 초야에 묻힌 명인을 섭외하던 담판은 할머니의 힘이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할머니가 골방에서 피운 담배는 시루떡처럼 켜켜로 얹힌 슬픔이었다. 그것은 돈이나 명예로 보상할 수 없는 애절함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견딜 수 없는 것을 맞이한 사람의 폐부에는 ‘잘디 잔’ 파편들마저 그림자가 되기 때문이다.

 

복제인간 같은 아이돌이 대세인 한류열풍에 박제된 상상력과 인스턴트 흥(興)이 심연 맨 아래 바닥까지 닿지 못함은 아릿함이 부재하기 때문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 맨 아래 사진 :  심화영 선생 젊은 시절 사진을 배경으로 노령의 심선생과 후계자 외손녀 이애리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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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여행의 기술》에는 “여행할 장소에 대한 조언은 어디에나 널려 있지만 우리가 가야 하는 이유와 가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고 한다《여행의 기술, 12쪽》. 여행의 목적을 두고 이 책의 저자는 "사람에 대한 관념을 느낀 대로 적은 여행기, 그곳을 땀 흘려 가꾼 옛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프롤로그에서 밝힌다.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맛집과 소호(SoHo)를 건너뛴 여행지의 역사와 설화를 채집한 여행서다.  


제목에서 지역을 동유럽으로 지정했지만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 3개국 여행서다. 그것도 2/3의 분량은 체코에 할애하는 바람에 폴란드와 슬로바키아는 곁다리 경유지처럼 짧게 소개된다.체코는 최근들어 한국사람들에게 인지도가 높은 여행지다. 여행사의 체코 여행상품이 러시(lush)를 이룬 이유는 공산주의의 몰락, 해체와 관련 깊다. 그동안 철의 장막 안에 감추어졌던 풍성한 문화, 예술에 대한 동경심의 발로이면서 유럽대륙과 연계된 편리한 교통시스템이 큰 작용을 했다. 게다가 영화 <프라하의 봄>-(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영화화 한 것)-등 광고를 통해 체코는 ‘낭만 프라하’를 각색했다. 밀란 쿤데라가 ‘에로틱한 도시 프라하’를 예찬하기 전에도 체코는 중세 유럽의 신화를 가장 많이 잉태한 국가다.

다리, 성당, 성(城), 골짜기와 거리에 얽힌 사연 많은 체코는 특히 유대인의 흔적이 많다. 지배층은 물론이고 골렘 전설(영화 '반지의 제왕'에서의 골룸의 유래) 같은 유대인 설화는 민중에게 파급력이 크다. 골렘 전설은 기독교를 선으로 두기 위해 유대인을 상징하는 골렘을
악의 화신으로 비유한 것으로 저자는 해석한다(130쪽). 대부분 기독교를 믿는 체코인들은 골렘이 나타나는 안개 낀 새벽을 두려워한다는 사연과 함께 존 로날드 로웰 톨킨(보통 J.R.R 톨킨이라고 부른다)이 만든 골룸의 의미를 다시 조명해보는 것도 좋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이분법적 배치도는 히틀러의 광포한 파시즘에 동조하고 유턴되어 유대인의 시오니즘으로 재편성되는데 기여했다. 외부에서 유입된 유대인이 끝내 유럽인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유일신을 섬기고 랍비를 모셨지만 일부 유대인은 스스로 유대의 명찰을 떼고 유럽에 소속감을 얻으려 애썼다. 이들 동화 유대인들은 차별의 불이익을 극복하고 동등한 이익을 추구하고자 융통성 있게 운신하며 귀화 외국인에게 관대하지 않은 유럽에서 자신들을 배척하고 차별한 유럽인과 함께 역사의 한 축을 형성했다.

유럽을 말할 때 유대인의 역사를 동시에 거론하는 이유는 유대인이 유럽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 갈가마귀라는 뜻을 가진 프란츠 카프카를 비롯해서 아인슈타인과 밀란 쿤데라도 유대인 피가 흐른다. 그러나 유대인이 원주민들 속에 섞여 만든 유럽문화는 더 이상 유대냄새가 나지 않는다. 카프카와 쿤데라는 체코 출신이지만 체코어로 글을 쓰지 않았다. 카프카는 독일인 교육을 시킨 부친의 영향으로 독일어로 글을 썼다.

쿤데라는 프랑스로 망명하면서 프랑스어로 글을 발표했다. 체코 출신이지만 체코어를 구사하지 않은 카프카와 쿤데라는 체코 현지에선 큰 호응을 받지 못한다. 그 대신 우리에게 생소한《착한 병사 슈베이크의 모험》을 쓴 야로슬라프 하셰크와《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의 보흐밀 흐라발을 국민작가 1순위로 꼽는다. 두 작가 모두 공산치하에서의 저항을 썼다. 굴곡많은 역사이다보니 개인성을 그린 작품보다 폭정에 저항하고 풍자한 작품을 국민소설로 꼽는다.



그러나 체코인에게만 민족적 자존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1918년 1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에 의해 연방국가로 탄생했다. 그러나 천만 명이 넘는 체코인과 540만 명의 슬로바키아인의 합방은 순탄하지 않았다. 다수와 소수의 비정상적인 결합은 예견된 분열이었다. 다수의 체코인들 대부분이 관직을 독점하고 체코 중심의 사회가 전개되었다. 기울어진 결합이 그렇듯 소수의 슬로바키아인들의 불만과 저항이 대두되었다. 같은 슬라브족이지만 오랜 기간 다른 문화를 유지해 온 두 집단은 동족의 개념을 상실하고 1993년 1월 1일 ‘평화로운 결별’을 했다. 375쪽에서 377쪽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리를 읽으면 분단 60년의 한반도가 떠오른다. 정치체제와 경제수준의 상이함이 언어와 사상과 문화의 차이가 쩍 갈라진 대륙판처럼 나뉜 이 시점에 동족의 의미란 남과 북의 대명사 안에 갇힌 것은 아닐까.


                                                                               
                                                   카를교에서 본 프라하 성(城)


예술을 통해 투영된 아픈 역사의 현장을 둘러본 이 책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프라하 인간 투척사건'이다. 종교와 정치대립이 빚어낸 투척사건은 물건을 집어 던지 듯 건물 위에서 아래로 사람을 집어 던진 사건이다. 이 역사적 실화는 그것이 종교든 정치든 권력독점의 도구로 사람의 생명을 요구했다. 투척사건이 터진 14세기에서 15세기는 세 명의 교황을 두고 각국이 종교권력을 전횡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차단하고자 마녀사냥이 극도에 달했다. 이때 종교개혁을 주장했던 얀 후스는 불붙은 장작더미 위에서 최후를 마쳤다.

프라하의 인간 투척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요구한 시민들이 귀족들을 처단한 시민봉기운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시민은 정치권력까지 합세하고 신구교간의 종파 대립으로 이어졌다. 권력의 정체성을 질문하게 만드는 이 분쟁은 유럽을 전쟁의 화염 속에 빠뜨렸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중세 유럽의 비극사를 답사한 것처럼 서술형 자료가 제시되었지만 이 책은 엄연히 여행서다. 답사기와 여행기의 차이점은 여행코스와 다루는 주요코드를 무엇으로 조준하느냐에 나뉜다. 답사기가 구체적인 목적성을 갖고 역사의 현장을 일부러 찾아간 것이라면 여행기는 여행지에서의 우연성에 의한 역사현장을 스케치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역사현장의 구체성을 지녔지만 여행서로 분류된다.  


                                                                   
                                                폴란드의 건국신화인 칼을 든 인어상




말하자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유럽 대륙의 호칭에서 ‘동유럽’은 서유럽과 비교할 때 국력이 열세하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을 지칭하는 명사다. 기독교가 큰 장애 없이 전파된 서쪽에 비해 동쪽은 많은 이야기를 낳았다. 러시아와 그리스 정교, 이슬람과의 충돌 등 동쪽은 종교적 갈등과 영토분쟁이 활화산 분화구처럼 끊임없이 달구어진 장소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모두 이 지역을 거점으로 발화되었다. 요네하라 마리는 프라하와 부다페스트를 지나 유고 쪽으로 접근하면 그곳은 유럽이 아니라 발칸반도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마리는 체코, 폴란드, 슬로바키아를 중앙유럽으로 부른다. ‘서유럽’의 상대성인 ‘동유럽’의 시선은 정작 동쪽의 사람들에게 패잔병의 수치로 들릴 수도 있음을 배려할 때 유럽을 보는 시선은 다양하게 확장될 수 있다.
유럽을 보는 시선이 획일성에서 벗어난다면 세계를 보는 시선도 자유롭다. 그것은 곧 저자의 여행목적처럼 사람을 향한 인문주의적 시선이다. 그래서 모든 여행은 옛사람이든 현대인이든 사람의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다.


발트해의 요정으로 불리는 폴란드 북부 항구도시 그단스크의 세 개의 태양

1989년 6월 항만 노동자 출신의 바웬사 대통령이 선출된 곳 



                                                                      

                   * <일생에 한번은 동유럽을 만나라> :
최도성 지음 / 21세기북스(북이십일) / 2010.7.22
                        * <여행의 기술> : 알랭드보통(지은이)/정영목(옮긴이)/이레/2004.7.26
                        * <문화편력기> : 요네하라마리(지은이)/조영렬(옮긴이)/마음산책/2009.12.10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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