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간송 전형필이 세운 한국 최초 사립미술관 보화각(葆華閣)[각주:1] 개관 기념일에 맞춰

성북동 북단장(北壇莊)[각주:2]에 모인 미술 애호가들.

왼쪽부터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 사진출처 : 간송미술문화재단





‘안목(眼目)’은 한자로 ‘눈 안(眼)’자와 ‘눈 목(目)’자가 합쳐졌다. 무엇을 보고 판단하는 식견이 있다는 뜻인 ‘안목’에 ‘눈’이 강조된 이유는 그만큼 ‘제대로 가치를 본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답사 열풍을 일으켰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 청장은《안목》(유홍준 지음. 눌와. 2017년 1월)에서 안목을 이렇게 정의한다. “안목은 꼭 미를 보는 눈에만 국한하는 말이 아니고 세상을 보는 눈 모두에 해당한다. 그래도 안목의 본령은 역시 예술을 보는 눈이다.”

 

미술사가 입장에서 안목의 본령은 예술일 수밖에 없다. 평생 입신과 생계와 명예를 예술 자장 안에서 꾸렸으니 미술사가에게 안목이란, 예술을 통한 세상 읽기 프리즘일 것이다.《안목》에서도 저자는 시대와 인간이 원했고, 만들고, 사랑한 미술 작품을 휴머니즘 관점에서 차분하게 서술한다. 이론적인 해설보다 역사에서 어떤 안목이 어떤 작품을 세상으로 이끌어냈는가에 주목했다. 




■ 추사의 불계공졸(不計工拙)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각주:3]는 9년 동안 제주도 유배가 끝나자 이전과는 다른 서체를 썼다. 처음 보는 독특한 글씨를 두고 사람들이 괴이하다고 말했다. 소문을 들은 추사는 지인에게 편지를 보낸다. “서체는 본시 일정한 법칙이 없고 붓이 팔목을 따라 변하여 괴(怪)와 기(氣)가 섞여 나와서 이것이 요즘 글씨체(今體)인지 옛날 글씨체(古體)인지 나 역시 알지 못합니다.”

 

괴하지 않으면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고 하소연한 추사는 대정읍 위리안치[각주:4]를 겪으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서체를 쓰게 된다. 서체만 바뀐 게 아니라 성정도 달라졌다.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수재로 성장한 추사의 서체에 관한 우월감은《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에 나오는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편액에 얽힌 이야기처럼 대단했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길에 들른 대흥사에서 대웅보전 편액을 떼어내고 자기가 쓴 편액을 걸었다고 한다. 떼어낸 글씨는 원교(円嶠) 이광사(李匡師)[각주:5]가 쓴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기 글씨가 낫다고 오만을 떨었던 것 같다. 9년이 지나고 추사는 해배 길에 대흥사에 다시 들른다. 이번에는 자기가 쓴 편액을 떼어내고 원교가 쓴 예전 편액을 도로 걸게 했다고 한다.

 

박규수[각주:6]는 추사 서체를 가리켜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평한다. 추사체는 조선왕조 통틀어 유일한 서체였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워 거부할 수 없는 서체로 받아들인 것 같다. 중국 명필 아류에 만족했던 서예가들에게는 추사체 등장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 문화 사대를 시대정신으로 삼은 당대에 추사체가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계산이 안 되는 건 자명하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앵포르멜[각주:7] 수준’에 이른 추사체가 중국의 고답에 빠졌던 조선 시대에 어떻게 환영 받을 수 있었겠나.

 

추사는 명나라 말기 서예가였던 동기창[각주:8] 서체를 배운 다음, 옹방강[각주:9]과 소식[각주:10]을 따라하고 구양순[각주:11] 등 역대 중국 명필을 익히고 공부했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글씨 흉내 내기였다. 저자는 제주도 귀양 이후 추사 서체는 일법(一法)을 이뤘다고 한다. 범인은 절망 앞에서 체념하거나 단념을 선택하지만 위인은 고통을 내적 연마의 시간으로 삼는다. 유배 고통이 추사를 수련의 길로 안내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박규수가 왜 추사의 연찬과 서체를 귀양과 함께 묶어 이해하라고 후대에 조언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두 번 말할 필요 없이 예술과 인생은 같이 간다.

 

■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조선 미술 특징은 소박함이다. 일례로 도자기에서 중국은 형태를 중시했고 일본은 색에 치중했으며 조선은 선이 아름다웠다고 한 야나기 무네요시[각주:12] 말처럼 조선 미술은 대중 친화적 느낌이 강하다. 우리나라 최고 불상으로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는 국보 24호 석굴암 본존불도 근엄한 가운데 인자함을 품고 있다. 불성과 인성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사례다. 한국인이 미술에서 드러낸 겸양은 건축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음양 이치에 따라 풍수에 영향을 받았지만 높은 산에 낮은 집을 지어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다. 집을 지을 때조차 구도를 염두에 둔, 마음과 눈을 거스르지 않은 담담한 결과였다.

 

저자가 한국인의 미학으로 꼽은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이다. 이 말은 김부식이《삼국사기》의〈백제본기〉에서 백제 궁궐 건축을 언급하면서 쓴 말로 삼봉 정도전이《조선 경국전》에서 다시 인용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중국 궁궐이나 유럽 궁궐과 비교해 규모가 작고 장식이 적은 조선 궁궐에 갖는 열등감을 의식한 말로 자주 쓰이지만 저자는 궁궐 건축에만 한정해서 쓰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검박한 선비문화를 유교의 지침처럼 삼았던 조선시대에 문방사우로 상징되는 사랑방 가구는 ‘검이불루’였으며, 규방문화는 ‘화이불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 정신은 찾기 어려워졌고 대신 일본이 남기고 떠난 문화를 식민유산처럼 받았다. 궁궐 전각은 철거됐고 문화재는 사라졌다. 혼란한 시대의 조류를 타고 서양과 동양이 뒤섞이는 시점에 전쟁까지 겪었으므로 폐허 속에서 문화를 말할 여유 없이 굶주린 배를 채워야 했음은 지난하다. 경제개발체제에 올인 해서 달리는 동안 모든 게 달라졌다. 검소함은 누추한 말과 같은 뜻이 되었고, 화려함은 부의 상징이었다. 철학적 의미로든 실천적 의미로든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경제동물이 된 오늘날 우리에게 소박하고 담백한 가치가 배부른 자의 요설로 둔갑한 것은 아닐까? 


■ 문화보국(文化保國)

‘문화란 정신’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누가 어디에서 쓴 글인지는 잊었다. 정신과 몸은 따로 있을 수 없으므로 만약에 문화가 정신이라는 말이 맞는다면 몸도 고달프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헬조선’이라는 말을 문화에 적용할 수 있는지 가늠해 봐야 한다. 물론 비정규직이 천만에 육박하고 실직자가 수백만에 달하며 노인빈곤, 인구절벽, 취준생, 3포세대와 같은 비참한 현실 앞에서 문화에 대한 회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책에서 다룬 일제강점기 미술애호가들을 읽노라면 고통스런 현실이라고 해서 문화를 저버리거나 하기 어렵다.이 문제는 왁달박달한 세속을 건너는 지팡이 같은 화두를 던진다. 적어도 이 책에서 다룬 엄혹한 시대에 미술품을 수집했던 자취를 보자면 ‘문화란 정신’이라는 말은 부족하다. 외려 ‘문화란 영혼’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각주:13]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난지 대구에서 “문화보국”이라는 글씨를 썼다.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각주:14]아들로 태어나 서예가이자 천도교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33명이 모여 3·1운동 선언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후죽순 난립한 제헌의회에서 최고정무위원 28명 가운데 한 분이었다. 서화를 보는 안목이 탁월했고 고서화 수집도 수천점에 달했다고 한다. 


구한말 태어나 세기 전환기를 겪고 국권침탈을 목격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쳤으니 파란만장한 시대를 몸으로 살아냈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저자는 개화파에서 민족지도자로 변하고 다시 미술사에서 거목이 된 오세창을 일컬어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위창은 1928년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을 편찬했다.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상·중·하로 나눈 조선까지 5편으로 구성”된 이 사전은 서화가들을 출생연도순으로 배열해 소개했다고 한다. 서예가 576명, 화가 392명, 서화가 149명 등 1,117명을 수록했고 관계 기록과 논평을 추가했다고 하니 웬만한 열의와 수고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일제가 극심한 탄압과 문화재 반출을 완악하게 저지르는 상황에서 꿋꿋이 자기 의지를 실천한 셈이다. 책에 따르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근역서화징》을 가리켜 “찬연한 등탑(燈塔)”, “암흑한 운중(雲中)”이라고 했다고 전한다.《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근역(槿域)’은 ‘무궁화 땅’이라는 뜻이고, 이는 ‘우리나라’라는 의미로 붙였다고 저자는 밝힌다.

 

위창에게 ‘문화보국’은 나라를 잃은 서러움이 바탕에 깔린 철학이다. 저자가 꽤 여러 단락에서 설명한 ‘문화보국’은 역설적으로 일제강점기에 활발했다. 책에서 다룬 것처럼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 수정(水晶) 박병래(朴秉來),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과 같은 미술 애호가들의 지멸있는 실천은 문화재 반출을 막을 수 있었다. 책에 따르면, 나라의 정신이자 위무이며 빛줄기였던 문화재를 지킨 이들은 일제 감시에도 불구하고 사들인 미술품을 품평하고 정보를 나눴다.

 

1922년경부터 경성미술구락부에서 경매를 열면서 일본으로 미술품이 합법적으로 넘어가고 심지어 ‘가이다시(買出)[각주:15]’가 판치는 시대에 높은 안목이 없으면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조선인 출신 미술품 애호가 등장은 우리 문화재 반출 막고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었다.”고 말한다. 오세창에서 전형필로 고유섭에서 최순우로 이어진 한국근현대미술사를 조망해보면 문화보국은 역사의 궤와 함께 결정될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게 되나니

저자는《안목》에서 미술사가로서 살아오면서 가장 뚜렷한 성과로《석농화원(石農畵苑)》을 번역해서 출간한 일이라고 고백한다. 정조 때 의관 석농 김광국이 수집한 그림을 엮어 화첩으로 만들었는데 제발과 화평을 곁들여 모두 10권으로 출간했다. 책에 따르면 수록된 작품은 267점이고 화가는 공민왕부터 안견과 김홍도에 이르기까지 101명에 달한다고 한다. “조선 400년 동안 화가를 총망라한 ‘조선시대 회화사 도록’”인《석농화원》은 2015년 유홍준 교수에 의해 영인본으로 재출간되었다.

 

《석농화원》은 높은 경매가격에 못지않게 유한준(兪漢雋)이 쓴 발문은 책 이름보다 더 유명세를 떨쳤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 때 보이는 건, 전과 다르다”고 한《나의 문화유산답사기》명문장은 사실《저암집(著庵集)》에 나오는 말로 유한준은《석농화원》출간 의도와 주제, 엮은이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했다.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나니 그때 수장한 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높은 안목을 지닌 미술애호가들이 고려청자와 달 항아리와 연적과 고서화를 모으고 있을 때 한쪽에서는 서양화를 공부하는 작가들이 나왔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고려인으로 살면서 북한 미술계를 지도했던 변월룡은 이념을 떠나 일제강점기 때 고국을 떠난 이주민 후손이라는 점에서 예술과 역사의 궤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운명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상흔을 피할 수 없어 마흔 한 살에 요절한 이중섭이나 살아서는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던 박수근도 예외는 아니다.

 

군부독재 시대에 옥고를 치루며 독특한 서체를 완성했던 신영복은 흡사 추사 김정희를 떠올리게 한다.《안목》말미에 다룬 현대 작가들조차 현대사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사연에 천착하다보면 이 땅의 굴곡진 역사가 더욱 도드라진다. 1980년대 지독했던 독재항거에 맞서 판화를 제작했던 오윤은 전설의 이름이다. 굵은 근육을 거칠게 표현하며 저항을 드러냈던 오윤의 판화가 걸개그림에 걸려 시위 군중 속에서 힘차게 펄럭였었다. 팔팔한 리얼리티를 주저 없이 드러낸 현대미술은 이종구로 하여금 농촌을 직시하게 하고, 황재형에게 탄광촌의 검은 풍경을 자아냈다. 이발소에 걸림직한 그림으로 대중친화에 다가섰던 민정기는 고지도 같은 산수화로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를 새로 짰다.

 

현실참여 모드가 민중미술로 거듭 나면서 현장성 중시에 대중은 눈길을 던졌다. 저자는 사실주의 경향이 강한 작가들은 당대에서 대상을 재현하려는 자세를 견지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예술이란 당대 현실을 반영하고 나은 사회를 염원하는 역할을 맡고 싶어 한다고 한다. 박근혜 정권에서 탄생한 여러 풍자화도 현실참여 의식에서 나왔다.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처럼 현상을 버리고 추상표현에 골몰한 화가도 궁극적으로는 ‘지금, 여기’의 공간을 물어본 것은 아닌가 싶다.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념으로 1년 동안 신문에 연재한 기고문을 엮은《안목》은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각주:16]에 인생론을 겹친 책이다. 남태응[각주:17]이 쓴《청죽화사(聽竹畵史)》[각주:18]처럼 “인간상 전체에 대한 깊은 이해까지 짚은 평” 이라고 할만하다. 긴 서평을 마치면서 우리에게 왜 안목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에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당연지언이다.


“당대에 안목 높은 이가 없다면 그것은 시대의 비극이다. 천하의 명작도 묻혀버린다. 많은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사후에야 높이 평가 받은 것은 당대에 이를 알아보는 대안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1. 1938년 간송 전형필이 성북동에 세운 사립미술관으로 현재 '간송미술관'전신이다. [본문으로]
  2. 간송 전형필 사저.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단장'이라고 불렀다. [본문으로]
  3.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학자이자 서예가. [본문으로]
  4. 위리안치 (圍籬安置)는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이다.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본문으로]
  5. (1705년 ~ 1777년). 양명학자이자 서예가. 나주 벽서 사건에 연좌되어 회령, 진도 등에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본문으로]
  6. 1807(순조 7)∼1877(고종 14). 조선 말기의 문신. 실학자·개화론자. [본문으로]
  7. Informel .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새로운 회화운동. 선묘(線描)의 오토메티즘, 산란한 기호, 그림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석회를 쳐바르는 기법 등을 구사, 구상 ·비구상을 초월하여 모든 정형을 부정. [본문으로]
  8. 董其昌. 1555(명 가청 34)년 ~ 1636. 11. 11. (승정 9년). 중국 명대 후기의 서예가. 화가. [본문으로]
  9. 翁方綱. 1733(청 옹정 11)년 ~ 1818(가경 23)년. 중국 청대 중기의 금석문학자, 서예가. [본문으로]
  10. 蘇軾. 1037년 ~ 1101년자가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사천(四川) 미산(眉山) 사람으로, 아버지 순(洵), 아우 철(轍)과 함께 '3소(三蘇)'라고 불리우며, 모두 당·송 8대가에 속했다. 소식은 시, 사, 문, 음악, 서법 등에 깊은 조예가 있었고, 정치에도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21세 때 진사가 되어 벼슬길에 들어섰으나, 북송 때의 격렬한 변법운동(變法運動) 및 신구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몇 차례 좌천당하는 등 정치적으로는 불운을 겪었다.. [본문으로]
  11. 歐陽詢. 557 ~ 641. 중국 당(唐)나라 초의 서예가. 북위파(北魏派)의 골격을 지니고 있으며, 가지런한 형태 속에 정신내용을 포화상태에까지 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해법(楷法)의 극칙(極則)이라 하며 칭송했다. [본문으로]
  12. 柳宗悦. 1889년 3월 21일 - 1961년 5월 3일. 일본의 민예연구가·미술평론가. 미술사와 공예연구 및 민예연구가로 활약하면서 도쿄에 민예관을 설립하여 공예지도에 힘을 쏟았다. [본문으로]
  13. 음력 1864년 7월 15일 - 1953년 4월 16일.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한말의 독립운동가·서예가·언론인. 《한성순보》 기자를 지냈고 우정국 통신원국장등을 역임했다. 만세보사, 대한민보사 사장을 지냈고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예술운동에 진력하였다. [본문으로]
  14. 1831년~1879년. 역관출신으로 추사 김정희 등 많은 문인과 교류하였으며 미술에 관한 안목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본문으로]
  15. 일제강점기 골동품 장사꾼들이 돌아다니며 헐값에 미술품 사거나 왜사기를 갖고 가서 바꿔 일본 상인들에게 되팔음. [본문으로]
  16. 책 만권 읽고 천리를 여행하면서 문인다운 자질을 길러 작품 속에 절로 배어 나오게 하라는 것. 19세기 전반 조선 시대 양식 됨. [본문으로]
  17. 南泰膺. 1687년 ~ 1740년. 1687(숙종 13)∼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문인. [본문으로]
  18. 《청죽만록聽竹漫錄》의 별책에 실려 있는 화평으로 조선 미술에 대한 신랄하면서 정직한 평론집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윤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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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붉은산 2017.02.17 15: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창 살기 어려운 시절에 사재 털어서 문화재지킨 분들이 있는가하면 장택상처럼 정치자금 장만 수단으로 삼은 인간들도 잇죠. 이거 어려운 책인것 같아 저는 패스하려고요. 안목이 넘나 안됩니다. ㅠㅠ

    • 윤미화 2017.02.17 2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안그래도 이 책에서 장택상을 일컬어 아쉬운 미술애호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미술이나 고전을 잘 모르시는 분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